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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May 17. 2024

라면 연대기 25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25     

후루룩.

라 군은 말없이 설익은 라면을 빨아들였다.

뜨겁고, 부드러운 면발이 입안을 채우면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불덩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 같았다.

평소에 그런 식으로 라면을 먹진 않지만, 

울화가 쌓였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라면을 삼키게 되곤 했다.

라 군은 가끔 그런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자신이 언젠가 신화에서 읽은 ‘살라맨다.’의 화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 대가로, 그런 식으로 라면을 삼키고 나면 며칠 동안 입천장은 물집으로 가득했었다.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는 라 군을 보면서 입을 오물거리던 영애는,

라 군의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봐야 중학생인 자신이 뭘 어쩌겠냐만,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통해 대략적인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라 군 아버지가 반신불수 상태가 되었고,

그게 연탄가스 중독 때문인데 그 방이 원래 방으로 쓰이던 데가 아니고,

창고로 쓰던 것을 고치는 과정이 어설펐다는 걸 모르는 그녀도 아니었다.

원래는 사람을 사서 해야 했던 일이지만,

돈이 드니 직접 하자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충 만들었음을 지켜본 그녀였으니까.

게다가 라미온네 집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렇게 사고가 일어날 줄은 몰랐고,

그것 때문에 라 군의 아버지가 거의 장애인이 되리란 것도 몰랐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라군 아버지 병원비까지 보증금으로 대신해 버리려는 것까진 정말 몰랐었다.

라 군네 사고가 있고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다시 학교를 제대로 나가게 된 라 군을 보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명랑 쾌활하게 하교할 때 아지트에서 만나자고 한 건 영애였다.

물론 좋아질 일이 없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평소와 너무 다른 무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라 군이 낯설었었다.

자기가 가까이만 가도 얼굴이 붉어지던 아이가 석고상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어쩐지 섬뜩했었다.     

그리고, 

야산에서 냄비에 물을 끓이면서 영애 어머니가 라 군네의 병원비를 대납하는 대신 보증금을 제하기로 했다는 말을 덤덤하게 중얼거리는 라 군은 그가 알던 평소 라 군이 아니었다.

라 군의 말투가 비난하거나, 영애에게 뭔가 묻는 그런 말투도 아니었고,

영애의 생각에 라 군과 같은 투로 말을 하는 사람을 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애써 지난 기억들을 더듬어보니,

그런 표정은 티브이에 가끔 등장하던 사람들에게서 언뜻 본 것 같은 기억이 났다.

대체로 그건 뉴스였고 그런 표정을 지은 사람들은 대개 무슨 정치범 같은 것으로 사형선고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런 것들이었는데,

그럴 때 사람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아무 관심을 덜어버린 그런 표정이었다.

그리고 물을 끓이며 자기네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라 군의 표정이 꼭 그랬다.


보통의 중학교 3학년의 얼굴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표정.

영애는 라 군에게서 그 말을 들으며 점점 두텁고 거친 천으로 가슴을 힘껏 졸라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비롯하여 라 군 정도의 또래들은 얼치기 나이대였다.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인도 아닌, ‘청소년’이라는 어정쩡한 용어로 정의하기에도 뭣한 기이한 정체성.

몸은 어느 정도 자라서 옛날 옛적이라면 이미 시집·장가를 가서 아이도 한 두엇 낳고도 남았을 나이.

이미 성년식을 치렀을 나이.

공부와는 꽤 오랜 기간 담을 쌓아가던 영애였지만 묘하게도 그런 상식들은 상당했었다.

그래서 주변의 아이들이 보기에 영애는 이미 거의 어른에 가까운 아이로 생각했었고,

학교에 갈 때도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한 버스에 타느니 차라리 지각해서 복도에 서는 벌을 택할 정도였던 영애다.

늘 북적대는 등교시간대에 버스에 오르면, 또래건 어른이건 할아버지 이건 할것없이 '만원버스' 라는 이유로 영애의 가슴과 엉덩이를 대놓고 주물럭 거리는게  짜증스러워서였다.

그렇다고 더 음흉한 눈빛을 보내는 담임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은 영애다.

느지막이 타는 버스는 이미 출근해 버린 어른들과 등교한 지 한참 되었을 학생들도 없어서 비교적 한산했는데,

늦은 시간에 교복을 입고 버스에 오르면 버스 기사도 갸우뚱하면서도 이미 풍만해져 버린 자신의 가슴을 음흉한 눈빛으로 곁눈질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 영애였다.

늘 그랬다.

버스에 타면 초등학생 고학년 또래부터 칠십은 넘어 보이는 노친네들까지도 영애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흘깃대는 거였다.

영애는 기분이 나쁘기보다 오히려 뿌듯했다.

이미 자신이 성인 여자들에 못지않은 관심을 받는다는 의미이니까.

그런 상황에는 오히려 도도하게 고개를 바짝 세우고, 길지도 않은 단발머리를 공연히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슴을 더 앞으로 내미는 게 영애였다.     

그런데, 라 군은 영애의 가슴에는 관심이 없는 듯 이렇게 점점 어둑해지는 시간에 야산의 풀숲 언저리에서 몰래 라면을 함께 끓여 먹으면서도 시선은 저 한강 너머 채소밭을 바라보는 것이다.

실은 라 군이 딱히 채소밭을 바라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라 군은 또래에 어울리지 않게 늘 저 먼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자신의 성숙함과는 또 다른, 세상을 초월한 존재처럼 보이는 것이 또 라 군의 매력이기는 했으니까,라고 영애는 생각했다.


 후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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