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알려줄게요 3
전 장에서 인테리어를 왜 해야 하느냐를 간단히 기술했었다.
‘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내 어린 날 동네의 기억은, 산동네인데 우리 집이 유독 높아서 아래에 보이는 집 지붕들이 온통 까맣고 벽은 그냥 날것의 시멘트 색인 블록벽이었던 기억이다.
후대폰도 없던 시절, 외부인이 동네에 와서 우리 집을 찾는 방법은 간단했다.
온통 시커먼 아스팔트 펠트만으로 덮인 블록집들인데, 그중에 빨간 기와지붕의 집은 우리 집과 또 다른 한 집. 단 두 집이 유이했으니까.
동네 아래서 올려보아도 (산동네니까) 까만 지붕들 사이로 유이하게 빨간색으로 보이는 지붕 집은 단 두채, 그것도 걸어서 채 스무 걸음이 안되었으니 찾기 쉬웠다.
그러나 정작 그 집에 살던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좌, 우 할 것 없는 시커먼 아스팔트 펠트 지붕이었으니 거의 단색의 풍경이 내 기억에 남는 동네의 컬러이다.
물론 집 마당에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심으신 수십 종류의 꽃과 선인장들로 인해서 다양한 색채로 가득했으나 담장에 다가서면 한눈에 보이는 풍경중 가장 압도적인 것이 검은색이었으니.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면 검정 펠트 위에 서로 달라붙는 걸 막기 위해 뿌려놓은 마사토 알갱이들이 반짝거렸었다.
그런 것만 보며 초등학교 때까지 지낸 사람이 눈만 뜨면 세계문화유산이던 이태리 본토박이와 비교할 수 있을까? 적어도 어릴 적 주변의 환경에 따라서 뭔가 영향을 받는 게 기본인데 말이다.
산동네 판자촌에 유이한 빨간 기와집 하면 그 동네에서는 좀 살았나 보다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그건 아니었다.
알고 보면 아버지께서 몇 달에 걸쳐 휴일마다 자력으로 세운 집이었다.
마치 고대의 노동자처럼, 저녁 퇴근 때마다 기와를 지고 올라와 마당에 쌓고 주말마다 지붕에 목구조를 만들어 기와지붕을 올린 것이다.
때로는 목재들과 합판 등속을 가져오셔서 그걸로 뚝딱뚝딱 부엌 찬장(요즘의 싱크대 상부장)도 만드시고, 서랍장도 만드시고, 게다가 예전은 요즘 같은 목공 본드가 없던 시대이니 아교를 중탕으로 녹여서 접착제로 쓰고 구리못으로 부속들을 붙이고, 톱으로 일일이 가구 바탕 목재를 재단하고 대패와 사포로 다듬질하고.....
고운 황토흙 (과거에는 요즘 쓰는 퍼티가 흔치 않았다)으로 나무의 옹이 부분을 메우고 다시 고운 사포로 다듬고.
천연 니스를 여러 회에 걸쳐 칠하고 나면 근사한 장식장이 완성되곤 했다.
아버지 직업이 목수도 아니고 이를테면 요즘 유행하는 DIY를 하신 건데, 그런 것치곤 너무나 프로 냄새가 나서 다른 아버지들도 다 그런 걸 만들 줄 아는 걸로 오해했었다.
그러고 보면 나 또한 그런 환경적인 영향을 받아서인지 목재에 톱질하고 조립하는 것에 전혀 거슬림이 없으니 아버지의 유산인 셈이다.
게다가 4남매 모두 미술을 배운 적 없지만 초중고 시절 교내사생대회뿐만 아니라 전국미술대회에서도 수상을 늘 했었으니 기본적인 디자인 소양은 얼추 있었던 셈이라고 자칭한다.
얼추 보아도 내가 운영하는 회사는 규모는 작지만 주변 인테리어 회사 대비 제법 연식이 있는 편인데,
디자인 업계에서 ‘연륜’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방향으로만 해석이 되진 않는다.
빅 10에 들 정도로 규모가 거대한 인테리어 회사들이야 어중간한 종합건설사를 훌쩍 뛰어넘으니 논외다.
보편적인 대중의 인식이 디자인하면 뭔가 좀 더 젊고 졸업시기도 오래지 않은 사람들이 더 감각이 좋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내가 나이가 있어서 변명하는 것인데 그게 반드시 그렇지 않다.
물론 늦게 시작했다는 초대 프리츠커상 수상자 필립 존슨도 서른이 넘어서였으니 뭐.
그러고도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는 이미 70 넘어서였다.
늦은 나이에서야 빛을 본 건축가는 루이스 칸, 60대 넘어서 알려진 프랭크 게리 등 걸출한 인물들이 있으니 뭐 위로가 된다.
참고로 건축공부 하는 학생들에겐 ‘ 위대한’ 루이스 칸은 빚더미 상태로 사고사 했다.
실은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물론 될 가능성도 없다 ㅠㅠ
시대의 흐름상 티브이에서 예전에 정말 내 보기에 새파란. 아직 싹도 안 올라온 이들이 어떻게 업계와 인연을 맺어 유명 디자이너로 탈바꿈되는 것도 많이 보았고, 되지도 않는 아주 거주자가 불편한 집구석을 만들어주고 생색내는 프로그램에 어처구니가 없던 적도 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이 나와서 유명 건축가로 행세하는 경우도 보았고, 같은 맥락에서 공인중개사 자격도 없는데 유명한 부동산 투자 중개인으로 활동한 사람도 있었으며 전~혀 관련 없는 사기꾼을 주식투자 고수로 띄워줘서 애먼 피해자를 양산하는 등.
미디어 매체란 아무튼 신뢰 못할 첩보를 대량으로 소비한다.
갑자기 지적질이 시작된 이유, 내가 건축의 변방에서 인테리어라는 아주 작은 부분을 붙잡고 지금껏 일을 하고 있는 이유를 대기 위함이다.
나는 아직도, 시멘트 냄새가 가득한 현장에 가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곳에 내 아이디어를 쏟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박동이 빨라진다.
건축은 제품 디자인에 비해서 소위 짬밥이 있어야 통하는 영역이다.
건축계에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괄목할만한 ‘젊은 건축가’ ‘ 히트 건축가’가 나오지 않는 것은 건축계가 워낙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다.
아직도, 도제 방식으로 일을 가르치기 때문도 아니다.
10년을 배워도 워낙 방대한 분야이고, 거기에 수많은 정보가 필요하며 법규에 맞추고 공학에 맞추는 디자인을 해야 하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그 완숙함에 이르는 과정은 사실 어느 나라나 똑같다.
야근을 노동법과 관련짓고 죄악시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일본, 미국, 프랑스, 스위스 디자이너들 모두 야근 많이 한다. 직종의 특성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히트 건축가가 나올 수 없는 이유.
가장 큰 이유는 특별하거나 특이한 형태의 건물을 선호하는 건축주가 없기 때문이다.
즉,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은 모두 소비자가 먼저 청하지 않는 한 디자이너가 가서 영업을 할 순 없다.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파밀리아 성당과 그 설계자 안토니오 가우디.
가우디 조차 구엘 백작이라는 걸출한 건축주를 만나지 못했었다면 아마 뒷골목 철제. 문짝 디자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위대한 건축이란 것은 건축주의 안목과 선택에 달려있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유명해지고 나면, 정작 건축가 자신은 크로키 같은 손질 몇 번하곤 제자들이 전체를 디자인하는 결과물도 적지 않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현상설계 나 경쟁 PT에 심혈을 기울인다.
대형 건물이나 대형 공간일수록, 소비자는 정작 그림이나 도면이나 동영상으로 제공되는 프레젠테이션을 아무리 봐도 실제 느낌을 느끼기 힘들다.
그래서 요새는 VR 기기를 이용하기까지 하는데, 그건 쇼맨십이라 할 수 있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우리가 이 정도로 준비했다, 는 표현은 되지만 실제 디자인 파워는 아니다.
그러니 소비자도 눈높이가 있지 못하다면 기념비 적인 랜드마크가 생기기 어렵다.
정말 ‘ 개취’가 되는 것이다.
뉴욕의 빌딩 중에서도 화교출신 건축주가 세우는 빌딩의 방향을 설계자가 잡는 게 아니라, 풍수지리를 보는 도사가 등장하여 방향을 잡아준 것도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다.
홍콩의 대형 빌딩들이 풍수도사들에 의해 특정한 디자인으로 변형된 사례는 많다.
아주 현대적인 기업조차도, 그런 이유로 사무실 여기저기에 물그릇을 놓거나 돌멩이를 배치하는 경우도 보았으니까.
뭐, 좋은 게 좋은 거다.
이건 교육의 커리큘럼이나 수업방식, 그리고 소비자의 높은 수준의 눈높이와 이해도 와 관련이 있다.
아래 사진들은 미국의 뉴욕 911 메모리얼 파크 설계응모에서 채택된 제안서, 하나는 워싱턴의 베트남 참전 용사 추모비의 1등 설계 제안서 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공적기관 주도의 현상설계가 있는데 저따위로 슥슥 스케치도 아닌 크로키 수준의 그림을 내놓고, 어쩌고 저쩌고 설계자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탈락시키고 말 것이다.
난 유학을 가보진 못했으나 미국, 영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건축 석사, 박사를 나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프로젝트 설계과제가 주어지면 한국의 학생들은 한국의 학부 때처럼 밤새워 도면을 그리고 투시도를 그리고 모형을 멋들어지게 만들어 프레젠테이션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 교수님들이 F 학점을 준다는 이야기였다.
정작 A학점이 나오는 친구들은 맨손으로! 오직 분필 하나만 들고! 칠판에 선과 면을 대충 그려가며 자신의 설계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위 사진의 중국계 미국인 마야 린이 홀로 설계했던 베트남전 추모비 같은 경우 사진의 크로키가 전부 다. 당시 마야 린은 21살 대학생이었다.
뉴욕 메모리얼 파크는 어떤 면에서 베트남전 추모비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장소다.
미국이 공격을 받은 건 2차 대전 진주만 때 말곤 없었다.
더구나 그곳은 하와이.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그것이 테러이건 뭐건 미국으로서는 진주만에 이어 '수치의 날'이다.
이 대단한 설계공모전의 수상은 이스라엘 출신의 마이클 아라드였다.
그 당시 마이클은 비자만료가 다 끝나서 곧 이스라엘로 쫓길 실업자 상태였는데, 가기 전 마지막 시도로 이 이 공모전에 참가했지만 돈이 없어서 위에 보이는 조악한 크로키와 싸구려 모형 분수와 재활용 플라스틱 조각을 모아서 모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결과, 5200 : 1의 경쟁을 뚫고 1등을 차지했다.
둘 다, 단순한 그림과 튀지 않는 디자인이 겹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 담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심오하다.
그리고 나는 그 젊은 설계자들보다, 그런 방식의 응모를 주의 깊게 들여다 보고 실제로 1등 설계를 골라낸 심사위원들의 탁월한 안목에 더 감탄한다.
또한 일반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결과물을 받아들일 수 있던 성숙한 눈높이의 시민들도 탁월하다.
단순히 형태를 멋지게 그려도 현실에서 적용불가한 디자인은 소용이 없다.
그리고 보통 예술품은 그 자체로, 작가의 명성에 기반하여 가격이 매겨지지만 건축물은 그렇지 않다.
부동산의 특성상 위치, 투자환금성, 최대치의 면적 등 자유로운 디자인을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싸게 디자인해서 비싸게 지었다고 부동산 가치를 더 높게 쳐주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차라리 낡은 부동산이어도 어느 날 밤 뱅크시가 낙서 하나 해준다면 그 가치가 더 높게 될 거니까.
디자이너의 마음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근 말이 많던 광화문 광장의 태극기 상상도를 보며 생각이 들었다.
호불호를 떠나서, 저토록 어쩌면 역사에서 치욕의 정치공작으로 남을지 모를 기념비를 만들겠다는데,
어째 상상도가 영 조악해 보였다.
그야말로 학생들이 기말과제로 낼법한, 보통은 편의점 디다인 시안 수준도 안 되는 그런.
왜지?라고 생각해 보니, 보통 국가계약법에서 자치단체가 입찰 없이 지정 수의계약 할 수 있는 용역 비용이 5천만 원 이하이니 그런 것 아닐까 싶다.
아. 차라리 손으로 스케치한 게 나은 거 같은데.
난 ‘잘하는’ 디자이너라고 할 순 없지만, 신뢰와 고객입장에서 보는 시선은 가졌다고 자부한다.
고객의 형편없는 눈높이를 코웃음 치며 비웃는 그런 디자이너는 아니다.
가능한 고객의 눈을 높여주려 애쓰고, 그게 안 되는 개인 취향의 문제라면 그 취향을 너무 시대 트렌드에 안맞이 않게 조율하는 지휘자다.
건축주가 원하는 니즈 보다 (상업 공간에서는) 그 공간의 주사용자가 될 고객이 원하고 편안한 디자인으로 유도하는 게 내 임무다.
그러려면 경험도 풍부해야 하고 엷어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건축은 이과 계통 중에서 공학과 인문학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는 분야다.
그리고 나는 아직은 모든 프로젝트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