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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l 24. 2024

라면 연대기 41

라면 연대기 41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다.


그 우연은 때때로 운명이라는 것으로 설득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악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복권에 당첨된다거나 하는 우연은 극히 확률이 희박한 반면에,

어딘가 달갑지 않은 우연은 오히려 잦은 편이라는 건 모순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달갑지 않은 우연이 벌어질 때는 그럴법한 상황에 자주 자신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왜 확률이 높아지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라 군이 현재 느끼는 감정이 그랬다.

그냥 ‘외박’이라는 휴가도 뭣도 아닌 모호한 기간의 제한된 자유시간에,

다른 곳 다 놔두고 하필 신촌을 갔으며 하필 사람들이 잘 들르지도 않을,

간판조차 불이 꺼진 다방을 굳이 찾아 들어간 것이 그러했다.     

라 군이 시골출신은 아니었지만, 

제법 오랜 시간을 최전방 병촌에서 보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도시에 대해 절반은 향수 동경심, 그리고 절반은 낯섦과 거부감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가지게 된 건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했던 그리스 철학자의 말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일단 기숙생활을 하던 공립공고는 먼 시골의 산골짜기 안에 있어서 도시와는 거리도 멀고 반은 야생 같은 생활이었고 그게 3년이었다.

그다음은 도시도 시골도 아닌, 그저 울타리 안에 격리되어 들판과 야산으로 훈련받는 것 외에는 아무 인적도 없던 오직 ‘군인’ 만의 세상이던 하사관학교.

그리고 아직도 땔감으로 아궁이 불을 지피는 최전방 병촌에, 눈 들어 보면 온통 산과 나무. 하늘이 가로 혹은 세로로만 보이는 깊디깊은 산골짜기에서, 이제 좀 짬밥이 되어 평소 영외거주를 한다고는 하지만,

늘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제한된 자유를 누리던 라 군에게 이따금 주어지는 ‘외박’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의 자유시간은 실체가 모호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대부분 시간을 지내다가,

갑자기 그중에 며칠을 외부세계에 나와서 지내게 되면 그렇게나 어색할 수가 없었다.

군대보다는 일반사회에서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긴데도 불구하고.

그러고 보면 이미 군대에서 살아온 시간이 더 긴 선배간부들을 보면 그들에겐 군대가 곧 삶이고 사회였기에 일반 사회에 대한 동경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금 힘들고 조금 통제가 많은 직장을 다닌다는 느낌이랄까.     

고등학교 교련교육


그래서 가끔 제한된 시간 자유가 주어진 간부들이 정작 신나게 도시로 들어오면,

그 이후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사실 많지 않았다.

부대 동료들과 함께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릴 때 친구들이 평일 낮에 갑자기 시간을 내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상황들도 아니고,

간혹 초중고 동창 친구들과 저녁에 만남을 가진다고 해도 그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서로가 생활하는 무대가 워낙 다르다 보니 그들이 만나면 과거 학창 시절의 지난 이야기들을 곱씹고 곱씹다가 더는 서로 나눌 교집합은 현실적으로 전혀 없다는 씁쓰레함을 식후에 나오는 박하사탕처럼 달콤 쌉싸래하게 되씹으며 다시 전방으로 돌아오는 반복이었다.

게다가 다들 대학생이거나 방위병인 시기인지라, 라 군이 그나마 직업군인 이랍시고 늘 술값과 유흥비를 모두 내야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웠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라 군은 외출 외박이 있더라도 과거의 친구들을 부르는 일을 하기보다는, 혼자 도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이미 자신은 속해있지도 않고 적어도 당분간은 ‘외인’에 불과한 모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신촌역 앞에 내려 특별한 목적도 없이 배회하다가 하필 젊은이들은 찾아들지도 않을 법한 지하 다방의 간판을 보고 무심코 내려가게 된 이유도 그런 배경에서였을 것이다.     


- 어서 오세….     


약간의 곰팡내와 약간의 화학적 방향제가 어우러진 어둑한 지하의 낡은 목재 문짝을 열고 들어서는 라 군을 향해 안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라 군은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병촌의 그 다방에서처럼 그녀, 영애가 빨갛게 칠한 입술을 반쯤 열곤 멍하니 서 있었다.

라 군도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제자리에 섰다.

오랜만에 정말 우연히 마주친 그녀는 병촌의 다방에서 처음 맞닥뜨렸던 것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보였다.

둘이 멍하니 서 있어도 지하의 다방은 텅 비다시피 해서 아무도 그들에게 시선을 주진 않았다.

라 군은 그 순간 자신이 마치,

생전 처음으로 사격장의 사격대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뭔가 저 앞에는 미지의 공간이 덩그러니 펼쳐져 있는데,

정작 자신은 뭘 해야 하는 것인지, 무슨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워진 상태.

그리고 이후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도 되지 않는 상태.     

사격장에서의 그 모호한 당황을 깨는 것이 조교의 구령이듯,

이곳에서는 영애가 그 조교처럼 라 군의 당황을 깨었다.

비록 옆 드려 쏴 는 아니고 여기 의자에 좀 앉아, 였지만.    

 

- 너 어떻게 여길 찾았어?      


라 군을 의자에 앉히고 맞은편에 앉은 영애는 심드렁한 표정, 그러나 음색은 짜증이 가득한 적대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라 군에게 말을 걸었다.

그 순간 라 군은 말문이 막힐 뻔했다.

그녀는 아마도 라 군이 이 장소를 찾아내어 들이닥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     


- 어, 여길……. 넌 어떻게 여기 있어?     


반문하는 라 군의 멍청한 표정을 흘깃 본 영애는 단박에 이 상황이 지독히도 우연한 우연임을 순간 깨달은 것 같았다.

그 깨달음 탓인지 영애의 자세는 더 느긋하게 늘어지며 표정마저 더더욱 심드렁해졌다.     


- 서울이 좁긴 좁구나. 하고많은 다방 중에 하필 이 구석진 다방을 굳이 들어오다니. 

야, 라면. 여긴 동네 할아버지들이 쌍화차 한 잔 팔아주고 바둑 드러나 오는 곳이라고. 

새파란 청춘이 왜 이런 데를 와? 좋은 카페가 널렸구먼.     


영애는 침이라도 뱉듯 말을 내뱉으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피워 물었다.

파란 연기가 어둑한 지하의 천정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 넌.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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