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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Aug 02. 2024

라면연대기  

42

라면 연대기 42     



- 어떻게라니? 뭘?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되묻는 영애의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바라보며 라 군은 말문이 막힐 뿐 아니라,

자신이 뭔가 잘 못 생각을 하고 있었나 하는 순간적인 생각에 빠졌다.

그건 마치,

사격장에서 주어진 총탄을 다 쏘고 확인하러 간 표적지에 작은 구멍 하나 없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와 같았다.

그리곤 자신이 겨누었던 표적지가 자신의 표적지가 아닌 옆 사선 동기의 표적지임을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허탈감.     


- 어떻게...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냐 말이야. 그리고 내가 준 돈은?     


라 군의 말에 권태로워 보일 정도로 늘어져있던 영애의 얼굴이, 사격장에서 가늠쇠를 노려보는 사수의 얼굴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 뭐? 너 그 돈 그냥 나 준거 아니었냐? 그리고 내가 다른 곳으로 갈 때 너한테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였냐? 너 그런 거였어?     


사납게 쏘아붙인 영애의 말에 라 군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건 그랬다. 자신이 영애에게 있는 돈 없는 돈을 박박 긁다시피 모아서 줄 때 그것으로 뭔가 영애에게 바라는 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영애와 그의 사이라는 게, 과거 철부지 시절에 셋집 주인집 딸과 세 들어 온 집의 아들이라는 관계.

그리고 동창이었다는 것 외에 뭐가 있었나.

철부지 시절 공원에서의 입맞춤, 그리고 병촌 다방에서 돈뭉치를 건넸을 때 영애가 덤벼들다시피 했던 입맞춤.

그 외에 뭐가 또 있었을까.     


- 어... 그게 아니라... 그래도...     


자연스럽게 라 군의 말꼬리는 우물우물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남의 표적지에 총알을 쏟아부은 놈이 무슨 할 말이 있겠나.

그냥 사선 밖으로 나가서 자갈밭에 머리를 박는 것 외에.     


- 네가 준 돈이 고맙긴 하지. 근데 그 돈을 어떻게 쓰건 그건 내 마음 아니냐? 그리고 너 한참 동안 부대 비상 걸렸었잖아. 공교롭지만 어쩌겠냐? 난 또 내 계획이란 게 또 있으니까.     


당당한 어투로 말하는 영애에게 라 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허탈했다. 그녀의 말에 뭔가 잘못된 게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게 뭔지는 몰랐다.

그저 잊어질 만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었던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이런 모습으로 다시 그의 앞에 등장했다는 것이 좀 어처구니없고 한편 서글플 뿐.     


- 그렇잖아. 내가 이 청춘에 그 전방골짜기에서 맨날 군바리들이나 상대하며 살아야겠냐. 나도 좀 도시에 살고 싶었어. 그래서 나온 거야.     


말을 마친 영애는 새로 다방문을 들어선 영감 두엇을 향해 발딱 일어나 마중을 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자기 아빠뻘은 훌쩍 넘어 보이는 노인들에게 코맹맹이 소리를 늘어놓는 영애를 본 라 군의 입맛이 썼다.

영애가 습관처럼 라 군 앞에 내놓은 정체 모를 갈색 도자기 컵에 담긴 액체를 입에 털어놓자,

쓰디쓴 엽차의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엽차라니. 이게 무슨 칠십 년대 다방도 아니고.    

차마 영애에게 ' 그러면 왜 내가 준 돈으로 빚도 안 갚은 거냐? ' 라고 묻진 못했다.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

. 

말없이 쌍화차만 두 잔을 비워낸 라 군을 끌고 나선 영애는 신촌역 뒤 어느 골목을 말없이 앞서 걸었다.

라 군도 말없이 영애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묵묵히 영애의 뒤를 따라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구불구불한 골목을 오르내렸다.

이미 어둠이 내린 골목길에는 정말 칠십 년대처럼 누런 가로등들이 드문드문하고, 여기저기 낡은 건물들 사이로 쓰레기들이 파편처럼 놓여 있었다.

라 군은 그곳이 마치 시가전을 훈련하는 훈련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고, 지린내 나고, 비좁고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또각또각 소리와 뚜벅뚜벅 소리가 골목에 잔잔한 반영을 일으켰다.

그렇게 한참을 어딘가로 거슬러 오르내린 그녀는 고만고만해 보이는 낡은 다세대주택 같아 보이는 건물 모퉁이로 들어섰다.

어깨가 꽉 찰 정도로 비좁은 녹슨 철문.

그 철문을 열자 철문만큼이나 비좁은 계단이 아래로 뻗어 있었고 영애는 그곳으로 내려갔다.

어둠이 잔뜩 웅크린 계단은 마치 그녀가 조금 전까지 일하던 지하 다방의 입구와 흡사했다.

삐걱 소리를 내며 낡은 섀시문을 연 영애가 불을 켰는지 어둡던 지하계단이 갑자기 환하게 불을 밝혔다.     


- 야, 라면. 뭐 하냐. 어서 들어와. 여기가 내 집이다.     


조금 쭈뼛거리던 라 군은 그녀의 말에 이끌려 반쯤 삐딱하니 열린 문 사이로 몸을 디밀었다.

비좁은 현관입구에는 약간의 곰팡내와 화장품 냄새가 뒤섞여 아까의 지하다방과 조금은 다르지만 많이 닮은 냄새가 훅 끼쳐왔다.

비좁은 현관에서 라 군이 군화의 기나긴 끈들을 푸는 동안 안쪽에서는 영애가 천장등을 켜고 뭔가 물건들을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라 군이 군화를 벗고 들어선 곳은 집이라기보다는 그냥 ‘방’이었다.

여관을 집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방이 있고 그 방에 침대가 있고 오른편에 작은 화장실이 붙은 그런 구조를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옹색했다.

그건 차리리 여관이나 모텔에 어울리는 구조였다.   

  

- 야, 바닥 꺼지겠다. 너 발냄새나니까 화장실에서 발 좀 씻어.     


영애의 말에 확 얼굴이 붉어진 라 군은 쫓긴 듯 현관옆에 바로 붙은 화장실로 들어섰다.

화장실 안에도 여전히 곰팡내와 샴푸냄새, 비누냄새들이 뒤섞인 묘한 냄새들이 맴돌았다.

라 군은 비좁은 화장실에 엉거주춤선 상태로 양말을 벗고 발을 닦았다.

이미 군화에 익숙해진 발은 여기저기 굳은살이 맺혔고 늘 볕을 보지 못하여 희부옇거나 누렇게 떠있었다.

엉거주춤의 발 씻기를 대강 끝낸 라 군이 화장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자 처음 맡았던 곰팡내와 화장품 냄새에 뒤섞여서 익숙한 라면 냄새가 더해져 있다.

그토록 좋아하던 라면의 냄새지만,

라 군은 어쩐지 욕지기가 치밀 것 같았다.

그리고.

여남은 개의 면도기. 그리고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구겨져 변기 구석에 뭉쳐진 양말들.

라 군은 걷잡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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