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비정상?
오래전 이른바 공교육에서 알려주는 지향점은 거의 비슷했다.
열심히, 전력을 다해 노력해서 좋은 대학을 가라.
그래야만 이른바 ‘성공’을 할 수 있고 ‘출세’를 할 수 있다.
조금은 다를 수 있지만 초중고 시절을 통틀어 받았던 교육의 핵심은 늘 그랬다.
공교육의 마지막이랄 수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국어 선생님이 했던 마지막 수업이 가끔 생각난다.
난 초중고 과정을 모두 공립학교를 다녔다.
그중에서 고등학교는 어찌 된 일인지 2명 정도의 선생님을 제외하곤 전부 서울대 사범대 출신이었고.
게다가 전부 남자선생님이었다.
학교 내에 여선생님은 양호선생님이 유일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쥐 잡듯 잡는 분위기였다.
이른바 ‘패배자’가 될만한 학생들은 거의 자포자기시키는 분위기랄까.
한 반에 70명 정도가 가득하니 그중 스카이 – 그때는 스카이라는 신조어도 없었지만 – 정도를 진학할 애들 한두 명 외에는 모두 열외였던 셈이다.
그렇게 고교졸업을 앞둔 시간에 앞서의 선생님들과 별다를 게 없던,
늘 냉정하던 국어선생님이 수업이 끝날 때 즈음 혼잣말 하듯 했던 말은 그게 사회생활을 앞둔 청춘들에 대한 조언인지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회한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간추리면 이랬다.
“ 내가 대학을 진학한 후에 동창회에 나갔을 때는 모두가 나를 우러러보았다.
몇 안 되는 서울대 진학생 중 하나였으니까.
그때는 항상 동창회에 가면 서울대에 진학한 친구들이 모임을 이끌어가는 그런 모양새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각자 직업을 갖고 일을 하다가, 마흔 넘어서 동창회를 가보니 상황이 달라졌더라.
학창 시절 공부도 못했고 졸업해서 대학도 못 가고 그런 애들이 야채장사를 하건 무슨 가게를 다녔건 이제 동창회에 나와서 어깨에 힘주고 밥도 사고 술도 사고 그러는데, 그런 친구들이 동창회를 이끌어가더라 ”
앞도 뒤도 없고 그래서 뭐 어떻다 하는 설명도 없던 선생님은 당시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한건 아니었던 기억이다.
낡은 교실의 창문으로 텅 빈 교정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였는지는 모르나,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 공감대는 있었다.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그것은 공교육의 틀에 맞춰 반듯하고 신실하게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을 졸업하여 좋은 기업에 들어가서 다시 수많은 경쟁을 통해 높은 위치로 상승하는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졸업식에서 소위 ‘성공한’ 선배들이 참여하여 강당 위 내빈석에 앉아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거창하게 앉아있던 기억도 난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중에 군복을 입은 대령이 앉아 있었던 기억은 난다.
혼자 눈에 띄는 군복을 입었었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졸업 선배 중에 꽤 높은 계급의 군인이 있었구나 싶었었는데.
정작 군대에서 보니 대령이라는 계급이 그다지 높지도 힘이 있지도 않은 계급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역시 자신의 눈높이에 따라 사람을 보는 평가도 달라지는 것 같긴 하다.
공교육의 영향은 커서, 군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늘 가졌던 방향은 ‘내가 열심히 해서 열심히 직급을 올리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주변의 친구들도 대부분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거꾸로 자신의 일 외에 부동산이나 재테크에 더 열일을 하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는 더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적으로 대기업과 거래를 하다 보면 현장 능력이 출중한 직원이 오히려 진급이 잘 안 되고,
늘 뺀질거리며 현장에는 참여를 가급적 피하면서 일도 적당히 하는 척하면서 진급시험을 열심히 하던 친구들이 진급하는 케이스도 보았다.
물론 그게 일반론은 아닌 흐름의 파편에 불과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참으로 공교롭게도 진짜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 보다 ‘적당히’ 일을 해가면서 자기 발전과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친구들이 ‘얍삽하게’ 윗자리를 낚아채는 경우를 많이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런 세상의 실체와 민낯을 겪고 바라보며 중년이 넘어서니 그동안 배우고 실천하던 삶에 대해서 어느 정도 회의가 든다.
내가 배워온 것과 같은, 아직 그 틀에서 크게 바뀌지 않은 공교육을 받고 있는 자식에게 그게 옳은 길이라고 확고하게 이야기해 줄 수 없는 모호함이 있는 것이다.
국가의 기본 헌법이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명문화되어 있다고 해서,
실제로도 모두가 평등하고 균등한 기회를 가진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신화.
이제는 절대 개천에서는 용이 날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어른이 되어버린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애초 금수저를 내려주지 못하는 처지에서의 부모란 미안한 존재일 뿐,
나는 그랬어도 너는 다르게 살 수 있다 하는 뜬구름 같은 희망사항을 강요할 순 없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현재도 똑같은 ‘연금술’에 대한 회의감이 있다.
다른 물질로 금을 연성하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대에도 있다.
다만 시도하는 방법론이 달라졌을 뿐.
그리고 실제로 현대기술에서는 납을 금으로 만들 수 있다.
단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므로 타산이 전혀 맞지 않아서 못할 뿐.
인간도 흙수저로 태어나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면 금수저가 될 수 있다.
단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과,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진 금수저 아이가 과연 제대로 된 인성으로 성장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일 뿐.
대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는 없는 현시대를 탓하고 싶지만, 지난 역사들을 돌이켜보면 이것이 시대의 문제만 이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