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달콤한 환상
정의라는 달콤한 환상
태어나서 후천적으로 받은 교육의 영향이겠지만, 어떤 측면에서 호모사피엔스는 선천적으로 ‘막연한 낙관론’을 지닌 개체가 아닌가 싶다.
‘불안’이라는 요소는 생명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제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자신의 신체를 망가트리는 기제이기도 하니까.
그런 요소 중 한 가지를 꼽는다면 사회를 이뤄가는 인간의 생존방식에서 정말 막연하게 ‘정의’라는 단어를 추종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가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세계적인 석학이 출판과 강연을 통해 한때 유명해졌던 것이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그 강연을 듣고 나름대로 세상에는 ‘정의’가 필요하다고 새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과연 ‘정의’는 인간들이 만들어온 사회에서 실천이 가능한 걸까?
인간이 고대로부터 ‘정의’를 추구해 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라는 것부터가 ‘정의’를 추구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물론 시대에 따라 ‘정의’에 대한 기준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보편적 의미의 ‘정의’에서 벗어난 것들은 존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니까.
그러나 애써 외면해 온 불편한 진실은 ‘힘에 의한 정의’라는 사실이다.
국가와 국가, 계층과 계층, 경제와 경제, 그 모든 것은 항상 ‘힘’의 크기에 따라 정의가 달라지곤 했었으니까.
최근의 예를 들어봐도 우크라이나가 만약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자국에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와 핵미사일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면 러시아가 과연 침공을 했을까?라는 가정.
만약 미국이 현재의 군사력과 생산력, 천연자원들과 지리적 이점이 없었다면 다른 나라들에 그토록 무례하고 무지막지한 관세와 압박을 줄 수 있었을까?라는 가정.
일본 또한 그들의 가진 지역적인 이점과 생산력과 경제력이 없었다면 주변의 국가들에 대해 그토록 제멋대로 식의 외교정책을 내세울 수 있었을까? 하는 가정.
분명히 주변국가들을 침공하여 점령하고 지배하면서도 개의치 않고 ‘그들만의 정의’에 당당한 중국.
열거한 국가들의 공통점은 군사, 경제, 기술 여러 면에서 ‘강대국’이며 그 강대국들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정의’와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
어쩌면 오히려 ‘불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실천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해당 국가의 다수 국민들도 그것을 믿고 신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기도 한다.
공교육을 받는 학교 기관에서 성장할 때 학생들을 지배하는 ‘정의’는 성적 혹은 재능 또는 지극히 동물적인 신체적 능력 따위가 아닐까.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물리력에 의존하려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폭력에 의존하여 범죄자로 남게 되긴 하지만,
학습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사회에 나가서는 자신의, 혹은 자신이 속한 이익집단을 위하여 ‘정의’와는 거리가 있는 횡포를 휘두르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학창 시절에는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어쨌든 ‘경제력’에 빠르게 적응하여 ‘경제’라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 힘으로 자신만의 ‘정의’를 구축하고 정치적인 성향의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오직 공부라는 것으로 집중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집단에 몸을 담은 사람들도 그 조직 내부의 정치적인 경향에서 그리 자유롭지는 못하다.
일반적으로 ‘정의’만을 내세워 치열하게 기존의 이익집단과 투쟁하던 사람들조차도,
투쟁의 수단으로 어떤 조직을 만들게 되면 스스로의 ‘정의’에 매몰되던 경우도 많이 보았으니까.
“ 정의(正義)|Justice
정의의 한자 正義를 해석해 보면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뜻한다. 영어 justice를 해석해도 똑같이 "정의"이다. 왜냐하면 동양의 정의라는 개념이 서양의 정의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다듬어졌기 때문이다.
서구의 문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잊으면 안 된다. 신에게는 신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 있으나 인간들은 알기 어렵다.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들이 최대한의 노력으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만들어 가고 있는 도구가 법이다. 그래서 법은 도구에 불과하고 목적은 정의이기 때문에 영어로 법무부를 'Ministry of Justice'나 'Department of Justice'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영어사전을 찾아봐도 Justice에 법집행, 재판이라는 의미는 있어도 '법'이라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법이 지엄해 보이지만 입법부의 가결 한 번에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뀔 수 있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입법부는 가장 민주적 정당성이 강한 기관이 맡는다. 그러나 법과 달리 한 사회의 정의에 대한 관념이 바뀌는 것은 어렵다.
"정의란 무엇인가?"는커녕 심지어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논의가 이어져 왔고 지금도 많은 논의들이 이어져오고 있다. ” 나무위키 펌
정의로워 보이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추상적 형태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정점에 있는 특정인물이 ‘정의’ 일 수 없고 권력 혹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쪽이 ‘정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 and you will go far.
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그러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25대 미국 대통령.
많은 미국인들이 존경하며 선출했던 미국의 대통령이 즐겨 쓰던 문장이라고 한다.
이 문장은 자국민에게는 ‘정의’ 일수 있다.
그러나 상대국의 입장에서는 결코 ‘정의’가 아니다.
주말에 오랜만에 날이 풀려서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탔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르려 여의도 공원으로 자전거 방향을 틀었다가 곧 후회했다.
여의도 전체를 전국에서 몰려온 관광버스들이 빙 둘러서 서있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인도, 자전거도로, 차도 모두를 꽉 채워서 지나오기 조차 어려웠다.
수많은 군중은 얼굴에 흥분이 가득하고, 교통정리를 위해 나온 경찰들도 너무나 많은 인파에 속수무책이라 신호등이나 질서유지를 위한 모든 것들은 그곳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누구나 거침없이 도로를 횡단하고 도로 위에 아예 좌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제지하거나 제재할 수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무엇이 ‘정의’인지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다수의 군중들이 자신들이 믿는 '정의'를 위해 개인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목청껏 부르짖는 그 시간에,
아이와 한가롭게 자전거를 타러 나온 나는 '불의' 인가?
두 갈래의 '정의'가 부딪치면 둘 중 하나는 '불의' 인 것인가?
나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