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복약 중입니다 9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by 능선오름


스스로 멘털이 꽤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라때는~이라 접두사처럼 말 앞에 붙으면 노인인데.

잘 놀라지 않는 편이다.

아니, 편이었다.


어쩌다 보니 일반적인 삶보다 조금은 시련이 있는 삶을 어릴 때부터 살아와서 그런지,

어지간한 놀랄 일에도 놀라지 않는 편이었다.

오밤중에 갑자기 총알이 날아들어 비상 전투태세를 할 때도 놀라기보다는 어떻게 ‘적’을 포착할지부터 신경이 곤두서던 그런 때도 있었고,

곁에서 뭔가 무너져 내려도 아무렇지 않게 다음 행동을 생각하던 때도 있었고,

봄마다 연례행사처럼 군사분계선에서 벌어지는 산불 진화작업에 조금 전 지나친 산등성이에서 지뢰가 터져도 놀라지 않았었고,

현장에서 누군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피를 흘릴 때도 놀라기보다는 응급조치와 그다음 조치들을 순차적으로 떠올릴 정도로 당황함 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그래. ~었고 ~이었고. 전부 과거형이다.

지금은 전화기 벨소리만 들어도 화들짝 놀란다.

문자도착 알림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그게 싫어서 무음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다음에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연락이 오지 않았나 하고 수시로 전화기 화면을 들여다봐야 하는 조급증.


가끔 퇴근 후에 리클라이너 소파에 길게 눕다시피 앉아있으면서도,

어깨는 바짝 움츠러들어 있고 양손 주먹을 꼭 움켜쥐곤 손목도 오그라들어있곤 한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긴장감이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이다.

이과답게, 그리고 유물론자답게, 미지의 공포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어둠이나 귀신같은 것을 두려워하진 않는다.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이성적으로 잘 알고 있으니까.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또렷한 근원도 형체도 마음도 아니다.

그냥, 그냥이다.

처음에 불면증과 불안감이 생긴 계기는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안 좋은 생활습관의 반복에 따른 결과물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서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잦은 내성과 반응의 변화로 이래저래 바뀐 약들에 휘둘리면서 오히려 안 좋은 부작용들이 생긴다는 것도 막연하게 느꼈다.

사실인지 아닌지, 그저 내 지나친 생각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기 확신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이유가 무엇이건 나는 거의 종일 온몸이 긴장해 있고 그래서 더 피곤하다는 결과다.

마치 당겨진 기타 줄처럼 팽팽한 그 긴장을 이완시키는 것은 현재로서는 알약 몇 개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직도 약 없이는 잠을 불러오기 어렵다.

알약 몇 개 때문에 새로 보험에 가입하기도 어려운 현실을 부딪치면 또 새로운 낙담이 생기고,

그 낙담 때문에 하루빨리 약을 끊어야 한다는 강박이 또 생겨버리는 악순환의 루틴이 반복된다.

처음부터 그러했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공포가 아니다.

공포도, 두려움도 아닌 무력함이다.

잦은 약 복용으로 인해 무뎌지는 감각과 하얗게 변해가는 단기 기억력의 상실이다.

그런 현실이 점점 나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고,

그 무력감에 스스로 점점 더 긴장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의사에게도 내 심경의 변화를 말하기도 싫어지는 것이다.

‘그냥 그저 그렇다’ 정도 이상으로는.

말해봐야, 약 한두 개 정도를 바꿀 것이고 그것으로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병원을 드나들다 보니 알게 된다.

나와 같은 증례에 대해 의사가 처방할 수 있는 약의 종류라는 게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해 자신할 수도 없고, 사실은 명확하지도 않다는 것을.

의사들이 알고 있을 약제의 기전도 수많은 증례의 통계에 불과하다는 것도.


지금은 연락처도 모르는 고교 동창중 한 녀석이 의대를 수석으로 들어갔었다.

그 녀석이 의사 면허를 취득할 때까지는 이따금 만나곤 했었는데,

원래 전공이 신경정신과였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의대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들은 대체로 신경정신과를 지원했다고 하니까.

신경정신과로 레지던트까지 하던 녀석이 어느 날 보니 갑자기 과를 바꾸었다고 했다.

진단방사선과로 바꿨다는 것인데, 그땐 진단방사선과는 대체로 인기가 없던 과였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녀석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 솔직히 자신도 그렇고 담당 교수도 사실은 어떤 증상에 대해 확실한 이유도 치료법도 잘 모를 것을 증상을 치료하는 게 아닌 덮어두는 약 처방 내려주곤 좋아질 거다, 괜찮다’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이 역할이라는데 너무나 한계와 분노를 느껴서, 차라리 확실하게 이것은 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전공으로 바꿔 버렸다 ‘라고.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니 지금은 좀 더 나아졌겠지.

그래.

나아졌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