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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완은 말없이 스스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조그맣고 투명한 잔에 투명한 소주가 꼬르륵 맑은 소리를 울리며 가득 채워졌다.
일렁이는 소주의 표면에는 천장등의 불빛이 반짝여 창완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 어서 마셔. 좀 쓰겠지만 그걸 마셔야 잠시라도 복잡한 머릿속 생각이 잊히잖아. 어서 마시고 또 마시라고’라고 속삭임.
창완은 속삭임대로 훌쩍 소주잔을 들어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쓰고 불같은 느낌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자신도 모르게 ‘캬’ 하고 탄성이 나온다.
그런 창완을 맞은편에 앉은 종선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녔으니 보통의 인연은 아니다.
하지만 수년간 거의 잠적하다시피 보이지 않던 녀석에게서 갑자기 모르는 전화번호로 문자가 왔었을 때는 요즘 흔하디 흔한 스팸문자 같은 게 아닐까 먼저 의구심이 들었었다.
나름 ‘부랄친구’ 치곤 서로 사화생활을 시작하면서는 결혼, 아이들의 돌잔치 같은 것 외에는 제각기 먹고살 길이 달랐어서 그간 소식이 없었거나, 전화번호가 갑자기 안되었거나, 어떻다 해도 굳이 수소문을 해서 찾을 정도로의 감정적 교집합이 없었기에 의아했었다.
사실 동네친구라고 지칭하는 친구들이 대개 그렇다.
초중고 동창을 함께 지내다 보면 성격이 맞아서가 아니라 물리적인 공간에서 계속 부대끼다 보니 친구가 되는 것이고, 더구나 개개인의 성격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시공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성인 딱지가 붙고, 저 마다 가는 길이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사회에서 엮어지는 관계들에 치중할 한창 일할 나이에서는 일반적인 사회관계에 더 집중하게 되므로 서로의 생사 정도만 알고 지내는 그런 것이다.
적어도 본인의 무심함을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 변명하던 종선이 갑작스러운 창완의 초청 아닌 초청에 응하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들은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 해진 나이였다.
사회적 위치에서도 정점은 찍은 지 오래되어 이제 슬슬 모두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을 위치였다.
출신지역이 비슷하고 엇비슷하게 초, 중, 고를 동창으로 졸업했다고 해서 그 이후의 삶들이 비슷했던 것은 아니다.
어릴 적에 어른들이 한결같이, 열심히 뛰노는 그들을 보며 ‘좋을 때’라고 혀를 차던 말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이미 깨닫고 깨달아 곱씹을 나이였다.
저마다의 직장, 직업, 그리고 결혼의 성공적인 유지 정도에 따라서, 이제는 자식들이 얼마나 ‘잘되고’ 있는지에 따라서 몇 안 되는 동네친구들 사이에서도 제각각 삶의 방식들이 완전하게 달라졌던 것이다.
종선이 마지막으로 알고 있던 창완의 직업은 편의점주였다.
대학 졸업 후 중견기업에 취직을 했었지만, 중간에 정리해고 업무를 담당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아 본인이 퇴사를 저지른 것은 어릴 적 일단 지르고 보는 친구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인의 편의점을 차려놓곤 늘 아내에게 일을 맡기고 밤낮 자신의 편의점에서 팔고 있는 소주와 라면과 김치를 거의 매일 마시고 먹다가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 되었다는 것.
그러다 가게 보증금도 까먹고 무슨 일인가를 하러 다닌다는 것 정도가 종선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홀로 소주잔을 연신 기울이고 있는 창완과 달리 그 옆에 앉아있는 친구는 이제 슬슬 흰 머리카락조차 벗겨져 정수리를 드러내고 있는 대호라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동네친구들 중에는 그래도 제일 잘 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변호사였다.
물론 사법고시 출신이 아니라, 사시가 폐지되고 나서 법학전문대학원을 들어가서 간신히 턱걸이로 늦깎이 변호사가 되었다는 것은 대부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동네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사’ 자 직업을 가진 친구였으니까.
원래 어릴 때도 말수도 적고 대신 은은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인데,
그렇게 해서 수년의 수험기간을 마쳐 변호사까지 된 것치곤 현실적으로는 조금 애매한 위치로 보였다.
그 친구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나왔을 때 그 친구를 찾는 법무법인은 없었다.
거기서도 성적이 그리 뛰어나진 못했는지 정작 갈 길이 애매했던 대호는 주로 자동차 사고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과 연계하여 원하는 사고자의 보험사와 손해배상을 주고받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서로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던 동네친구들이 그래도 함께 모여서 대호의 변호사 시험 합격을 축하해 준 것은,
언젠가 막연히라도 행여 법에 대해 관련한 일이 닥쳤을 때 그나마 유일하게 상담이라도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종선 자신이야말로 보험사 영업직으로 들어가서 천신만고 끝에 이제 간신히 대리점장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한결같이 같은 직종으로 근무하고 있는 셈이었다.
현실은 이제 갓 마흔을 넘은 본부장 밑에서 아침 조화 때마다 실적 압박을 받고 있는.
앞으로 싫어도 곧 스스로 그만둬야 할 처지의 상황이긴 하지만.
기억할 이유도 없고, 기억날 근거도 부족한 지극히 오래전 학창 시절 이야기들을 안줏거리 삼아 술이 한순배 돌고 나서야 말수 적은 대호가 입을 열었다.
- 창완아. 무슨 일이냐? 요즘 편의점은 괜찮고?
대호의 말에 창완은 일부러 쥐어짠 듯 쾌활하게 떠들어대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앞에 다시 제 손으로 채워놓았던 소주를 그 입에 털어 넣었다.
- 야 인마. 나 편의점 보증금 처남에게 사기당해서 다 날린 지가 언젠데. 지금은 물류센터 야간 포장일 하고 있어.
대호는 잠시 머쓱했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들이 이렇게 만난 게 아마 오 년 전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모두 전화 한 통을 잘하지 않는 사이였으니.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일들이건 벌어질 수 있는 게 세상인데.
그리고 대호는 그 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들을 간접적으로 많이 바라본지라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고 말았다.
대호의 반응에 발끈했던 창완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자신이 부랄친구들을 모이자고 했던 이유가 비로소 생각난 모양이었다.
정색을 하고, 둘 밖에 안 되는 종선과 대호를 굳이 과장된 몸짓으로 번갈아 보더니 자뭇 엄숙한 얼굴로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 야, 원래 이 자리에는 성철이 하고 종국이가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여기 없잖아.
창완의 말에 종선과 대호는 살짝 미간이 찌푸려지며 얼굴이 굳었다.
셋은 약속한 듯 갑자기 입을 다물고 술집의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변두리 유흥가의 비좁은 거리는 원래는 제법 복작이는 곳이지만, 봄비치곤 굵게 내리는 비로 인해서 이따금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지나는 행인 말고는 고요했다.
아니, 고요하진 않았다.
빗속에서도 빗길을 뚫고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가 간혹 있었고,
제아무리 시끄럽게 틀어 놓아도 손님 하나 오지 않을 지하 노래방의 외부스피커가 뭔지도 모를 노래를 흥겹게, 그리고 거슬리게 들려왔다.
소음의 잔향은 얇고 낡은 술집 유리창을 울렸고 정작 술집에서는 티브이를 틀어놓아서 늘 패턴이 똑같은 저녁 뉴스가 뭔가를 웅얼대곤 했다.
그리 크지 않은 술집에도 두서너 팀만 있어서 파장 분위기 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