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 매니아 5

재수 없는날

by 능선오름

울트라매니아 5

나는 나 자신을 잘 안다.

특별히 큰 죄를 짓지 않고 나름 성실하고 나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도덕적 이거나 윤리적 이어서라는 뜻은 또 아니다.

평범하게,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집안이 부자도 아니었지만 등록금은 그럭저럭 대줄 정도였으며,

수도권 중위 대학의 그저 그런 학과를 그저 그런 성적으로 졸업하여,

대기업도 아닌 소기업에 그럭저럭 취업하여 박봉에 힘들지만 그럭저럭 생활을 해왔다.

그럭저럭 나와 같은 비슷한 인생을 걸어온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았고,

빚이 대부분 이긴 하지만 변두리 아파트를 분양받아 겉으로 보기에는 넉넉하지 못해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소시민.

취미나 여가 같은 건 즐길 시간도 돈도 없지만 이따금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놀러 가고 휴가철에는 가까운 서해안 해수욕장 이나마 오가는 그런.


어찌 보면 회사가 위치한 디지털단지 일대 수만 명의 직장인 중 한 사람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인생을 살아온 그런 사람이 나다.

남들이 그렇듯 으레 다녀올 군대 입영 전 날 술 취한 친구들과 단체로 총각 딱지를 떼었다거나,

젊은 시절 친구들과 더불어 음주가무를 즐겼다곤 하나 그마저도 두드러지지 않을 정도로 미미 했었고,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급여에 인생을 살아가는 보편적이고 재미없는 그런 삶.

그게 나였다.

이따금 회사에서 포스트잇 을 가방에 넣어 오기도 하고,

사내용 볼펜을 나도 모르게 포켓에 넣고 나오기는 해도 의도적으로 회사에 피해를 끼치려 한 적도 없다.

도덕적인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뭔가 회사에서 꼬투리를 잡힐 법 한 그 무엇도 조심스러웠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뿐 아니라 대부분 내 세대의 동료들도 그러했다.

영악하지 않고, 머리가 아주 민활하지도 못하며,

남들처럼 영어회화 학원에도 다녀 보았지만 한계를 느끼고 하다 그만두는,

없는 돈에 운동기구를 사서 맹목적인 건강 가꾸기도 하다가 결국 쓰레기로 버리고 마는 그런.

오늘 나는 누명을 쓰고 그대로 집에 들어갈 용기도 없고,

억울함을 풀어낼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 자라 온 사십여 년을 통째로 고층건물 옥상에서 던져 버렸다.

어쩌면 그저 그런대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억울하긴 하지만, 어려운 대로 어떻게든 재취업 이든 뭐든 하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로부터의 차가운 시선이 아예 무시하는 시선으로 바뀌고,

아내도 어느 고깃집 서빙을 나가야 할지도 몰랐고,

아이들의 알량한 과외도 끊어야 할지 모르지만 다시 뭔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당하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자괴감은 충분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모르긴 몰라도 더더욱 커질 자괴감이었다.

그래서 몸을 내던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성적 논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억울하고, 분하고, 모두가 등을 돌린데 대한 증오 같은 것 이 나를 떠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게다가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뭐가 어찌 된 걸까.

대체 왜 나는 물리학과 생물학의 원칙을 거슬러 살아남은 건가.

티브이 프로그램에나 나올법한 미스터리 한 생존을 한 것일까.

이게 가능하긴 한 일인가.

만약 내가 떨어진 중간 어디에 나뭇가지라도 있어서 충격을 줄였나?

그렇다 해도 이리 멀쩡할리가 없는 일이다.

옷이 찢어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더구나 머리통이 반쯤 보도블록에 파묻힐 정도의.

그런데 왜 살아남은 건가.


골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젠 어느 정도 나서서 걸어가도 타인들에겐 취객 정도로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늦은 퇴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은 곁에서 좀비가 걸어간다고 해도 아무 관심이 없을 터였다.

회사로부터 먼 거리가 아니었고,

이미 휴대전화의 행방은 불명하겠지만 한 번은 가봐야 했다.

아직 할부금이 많이 남은 전화였으니 어떻게든 보상이든 재 교환 이든 될 것이었다.

그리고 휴대폰이 있어야 전철을 탈 것 아닌가.

지금 다시 어딘가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고 싶어도 이 근처 건물들은 모두 보안이 철저해서 들어가기도 어렵다.


어둠이 점점 거리를 뒤덮자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막다른 골목을 서둘러 뛰쳐나왔다. 알량한 휴대폰을 빨리 찾아야 했다.

순간 눈부신 빛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굉장히 큰 소리를 내며 뭔가가 내 몸뚱이를 덮쳤다.

순간적으로 나는 어두운 밤하늘과 거리의 불 밝힌 간판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보았다.

잠시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음과 동시에 나는 차도 위로 떨어져 내렸다.

뭔가 시커먼 덩어리가 두어 번 내 가슴과 다리를 무겁게 타고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 서슬에 나는 아스팔트 차도를 데굴데굴 굴렀다.

어디선가 우지직하는 소리.

그리곤 급제동하는 소리.

거참 오늘은 재수도 어지간히 없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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