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 매니아 7

운수 좋은 날

by 능선오름

울트라매니아 7

오늘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했던 세 사람이 하필 그 장소에 있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등장으로 인하여 그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저들이 행여나 나를 보고 저렇게 당황하며 두려운 표정을 지을 날이 올 줄이야.
마치 몰래카메라 연출자가 느닷없이 등장하는 그런 기분이 뭔지 알 듯했다.
상황도 상태도 어울리지도 않았을 내 인사말에 셋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대표는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기까지 했고,

팀장과 관리 이사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이 선채로 오줌이라도 지리고 있는 게 아닌지 슬슬 염려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다소 뜬금없는 두 번째 대화.


“ 전 괜찮아요. 옷이 좀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시끄럽게 만들었나 봅니다.”
아, 이런. 이 무슨 개 같은 소리 인지.
쌍욕을 하면서 길바닥에 퍼질러 진상을 부려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역시 나의 본성을 버리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길들여진 개의 근성.


“ 아니! 저, 우과장. 대체 어찌 된? 아니 저기 병원? 아니 아니 몸이? ”


나름 프레젠테이션의 전설이라는 팀장 놈이 버벅 거리는 걸 보니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이십층에서 떨어진 놈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멀쩡하게 돌아와서 인사를 한다면 겁이 나긴 했을 터였다.
게다가 건물 앞 이라곤 하지만 퇴근 시간도 지나 지나는 차량들도 드물고 인적도 드문 어둑한 시각에.

그들이 항상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다니던 보안직원들도 아주 멀찌감치 사옥 현관 속에나 있는 상태이니.

“어, 우과장. 괜찮아? 떨어졌단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근데 사람이 없어……. 아니 시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걱정을,

어 참 우과장. 왜 그랬어? 왜 뛰어내린 거야? 실수지? 응?”


그래도 역시 회사 대표 란 건가.
대표는 제일 먼저 뒷걸음을 친 것 관 달리, 앞으로 나서며 내게 말을 걸었다.
게다가, 그 짧은 와중에도 ‘회사 탓’ 이 아님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말을.
그들이 나의 생환을 다행스러워하기보다는,

내 생존으로 인하여 뭔가 회사가 귀찮은 주목을 받게 될까 두려워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입맛이 썼다. 그리고 생전 안 해 본 수작을 좀 걸어 보기로 했다.


“ 글쎄요. 말씀드렸듯 저는 그 USB 알지도 못하고 단지 시킨 대로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당장 사표를 내라고 하시니……. 뭐 억울하기도 하고, 그랬네요.

어찌 된 일인지 저도 모르지만 죽진 않았네요. 다행 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쪽 편에서 사색이 된 얼굴로 진땀을 흘리던 관리 이사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어이. 우과장. 다행인 거지. 다행인 거야. 처자식 생각을 해야지!

아니 무작정 투신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리고, 여기 팀장한테 확인해 보니 자기가 외출 중이라서 착각을 한 것 같았다고, 그렇지?

고 팀장. 내 말이 맞지?”


관리이사가 연신 대표와 팀장을 향해 눈을 찡긋 거리며 내게 말을 이어가는 걸 알았다.
아마도 이 상황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진 않았으나,

관리이사는 내가 살아있는 편이 당장은 회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마치 사전에 모의라도 했던 것처럼 나머지 둘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그럼, 그럼, 너무 성급했지, 암. 이런 단어들로 나름 동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더 이상 이들을 다그친다고 해봐야 내가 갑의 위치로 올라갈 수 없음을 안다.

물론 내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면.

그래서 뉴스에 실리고 어쩌고 헸다면.

내가 쓰진 않았지만 그들은 알 수 없을 유서 같은 거라도 발견되었다면.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봐도 그들이 내 죽음으로 매우 번거롭고 비용이 드는 일이 발생할 건 뻔한 일.

그보다는 이렇게 살아있는 게, 게다가 이유는 몰라도 매우 멀쩡해 보인다는 게,

적어도 그들에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이 정도에서, 다들 당황하고 있을 때 뭔가 합의를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 그럼, 제 누명이 벗어진 거죠? 퇴사 안 해도 되는 겁니까? 그렇죠?”


바로 따지듯 묻는 내게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고 답을 했다.

갑자기 대표가 크게 손사래를 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어쨌든 우과장, 오늘 큰일 치를 뻔했네 그래.

아무튼 늦었으니 어서 퇴근하고, 아 그 옷이 다 걸레가 되었으니 가면서 옷이랑 신발이라도 사 입고.

동대문 같은 데는 심야에도 영업하니깐.

그렇지? 내일 보고 얘기 하세.

지금 괜찮아도 혹 밤에 무슨 후유증이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대표의 손에는 수표 몇 장이 어느새 쥐어져 있었다.
평소 같으면 놀래서 거부했을 나였지만 아무 말 없이 공손하게 수표를 받아 들었다.

어쨌거나 옷과 신발과 휴대폰은 사야 하지 않나.
그리곤 먼저 가보겠다라고 하곤 그 자리를 떠났다.
자리를 벗어나며 혹시 하는 마음에 구덩이를 둘러보았으나, 어둠 탓 도 있겠지만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구덩이 옆에는 회사 경비실에서 내다 놓은 것 인지 ‘공사 중’ 이란 팻말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나는 망연히 서 있는 세 중년을 뒤로하고 지하철 역으로 향 했다.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새 양복을 사 입을 모양이다.
게다가 새 구두도.
돈이 여유 있으니 아이들 과자라도 넉넉하게 사 갈 수 있겠지.
그리고 내일도 출근할 수 있다!
은연중에 콧노래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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