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바퀴 위의 단상

왜들 그러나

by 능선오름

영포티? 영포티!

요즘 사십 대를 일컫는 ‘멸칭’을 영포티 라고 한단다.

대체로 명품을 걸치고, 젊은이처럼 보이려고 스니커즈, 버뮤다팬츠에 로고 선명한 티셔츠, 스냅백에다 목걸이까지 걸쳐주면 ‘영포티’의 반열에 든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 젊은이들의 패션을 따라 하는 모양새를 영포티라고 부른다고 하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주책맞음’을 표현하는 신조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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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패션업계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사용자가 이십 대에서 유행하다가 사십 대가 유입되기 시작하면 외면당하는 그런 현상도 있다고 하니 일종의 혐오 내지는 기피현상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 비싼 명품을 걸치고 스트리트 패션에 도전하는 40대, 일명 ‘영포티(Young Forty)’.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구매력을 앞세운 젊은 40대’의 상징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꼴불견”, “늙은 티”라는 조롱 섞인 멸칭으로 전락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들이 즐겨 입는 브랜드를 모아 만든 ‘영포티 브랜드’ 목록이 떠돌고 있다. 뉴에라 모자, 슈프림·스투시·우영미 티셔츠, 나이키 농구화 등 한때 ‘힙’했던 아이템들이 지금은 ‘아저씨 전유물’처럼 꼬리표가 붙는 셈이다. 최근에는 라부부는 물론 오렌지색 아이폰 17까지 이 명단에 합류했다. “ 김도연 기자

doremi@sedaily.com


만약, 십 대와 이십 대 젊은이들이 없는 돈에 위와 같은 브랜드를 소비한다고 하면 그건 사치 아닌가.

그 정도 구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 유행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 멸시당할 일일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 사회는 특정 나잇대는 특정 패션을 따라잡아야 하는 일종의 외적 계급도 라도 있는 것인가.

나는 동조하지 못하겠다.

젊었을 때, 경제적으로 무리해서 마련할 수 없던 물건들을 이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겨서 구매한다는 것이 그토록 비난받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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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패션잡지에 등장하는 ‘닉 우스터’라는 아조씨가 있다.

패션업계에서 경력을 쌓았고, 어릴 적부터 옷 사기를 좋아해서 스타일 있는 할아버지로 유명한 사람이다.

굳이 끌어들인다면 그런 사람은 비난받기는커녕 시대의 아이콘 정도로 불린다.

그런데 정작 그가 입은 옷들을 보면 정말 불편하게 보이는 옷들이 많다.

보기에 불편하다기보다 저걸 입고 종일 일을 본다면 참 피곤하겠다 싶은 종류의 옷들이다.

그는 유명인이므로 제외되는 건가.

아니면 그도 영 식스티 정도 되는 건가.


물론 이른바 '영포티'에 속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아무 생각 없이 젊은이들의 유행을 따라 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개는 ‘젊은이’라는 카테고리를 생각하지 않고 ‘유행’이라는 카테고리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거기서 놓친 것이 있다면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젊은이들의 유행을 따라가는 모양새가 된다는 것일까?

왜 유행에 나이를 둬야 마땅하다는 고루하고 꼰대 같은 생각을 젊은이들이 하는 걸까?

‘젊다’는 것은 상대적인 비교다.

어떤 노인이 젊은이들처럼 힙합을 좋아하고 힙합 패션을 즐긴다면 트렌디한 것이고,

평범한 중년들이 젊은이들처럼 편하게 옷을 입으면 영포티라 멸시당한다는 말인가?

‘개성’ 보다는 ‘획일화’를 사회적 룰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사고방식 탓 아닐까.

무엇을 입고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든, 그것이 본인이 원해서 하는 거라면 비난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줏대 없이 어떤 특정 브랜드, 특정한 활동, 특정한 취미생활 등등을 일정 연령대의 ‘특정한’ 유행으로 따라 흐르는 것이 더 보기에 안 좋다.

자기 자신의 색깔이 없다는 말이니까.


그런 면면에서 나는 ‘영포티’라는 말에 깃든 혐오감이 더 혐오스럽다.

한창 자유롭고 제한 없는 사고를 가질 젊은이들이 왜 그런 식으로 특정 모둠을 만드는 편협한 사고를 가지는가?

그건 바로 꼰대로 가는 지름길인데.

사람들의 유행이 어떠하고 그 나잇대가 어떠하든 그건 상관할 일도 아니고 신경 쓸 일도 아닌데.

사십 대에 유행하는 신발을 신는다고 이십 대가 사십 대가 되는가?

그런 사고방식은 의식 저변에 깔린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에 다름 아니다.

현재 ‘영포티’라며 사십 대를 멸시하는 이십 대는 사십 대가 되기 전에 모두 죽을 건가?

그들 역시 세월에서 자유롭지 않다.

십 대 친구들의 어른에 대한 반항, 멸시, 터부는 이해한다.

아직 ‘미성년자’니까.

마치 십 대가 영원할 것처럼 사는 나이 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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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식적으로 성년기가 된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철이 덜 든 것이다.

영원히 철이 들고 싶지 않다고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그 나름대로 그 사람의 철학일 거고 대부분은 철이 들어야 나머지 일생을 산다.

매일 하루만 살 것처럼 살 순 없다. 적어도 어른이라면.

그렇다면, 당신도 당신 기준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행태를 멸시할 순 없다.

적어도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데 무관심한 사람들은 꼭 나이 탓이 아니라 젊을 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 한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혐오하진 마라.

그게 바로 당신이 ‘꼰대’라는 증거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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