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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Mar 05. 2024

학생들은 왜 교사를 힘들게 할까

생물 1

내가 고등학생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나를 정말로 힘들게 하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진로도, 목표도 없고, 무언갈 하려고 해도 따라와 주지 않는 무기력한 학생들, 매사 불만이 가득하고 화를 내며 뛰쳐나가는 반항적인 학생들, 이들이 나를 힘들게 했던 대표적인 학생들이었다. 이런 학생들이 반에 더러 있어서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는 활동이 계획되어 있으면 일주일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기 전까지 활동이 잘 진행될까 걱정을 하고, 활동날이 다가오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손이 덜덜 떨렸다. 심지어는 학생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와 활동을 방해하고 나를 괴롭히는 꿈까지 꾸곤 했다. 이 상황이 반복되니 나는 항상 불안했고, 우울했고, 학교에 가기 싫었다. 그때 나의 가장 큰 화두는 학생들이 싫다는 것이었고, 교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범람하는 불안 속에서 ‘학생들이 싫다’며 끊임없이 고통을 호소했던, ‘우울한 교사’였다. 그럼에도 학생들에게 불만을 표출하며 학교의 테두리를 벗어날 용기는 없었던, ‘방황하는 교사’였다. 나에게는 여전히 30년이 넘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남아 있었고, 이대로 계속해서 우울한 마음으로 학교를 방황할 생각을 하니 두려워졌다. 그래서 앞으로의 교직 인생을 위해 학생들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 있었고, 좋아했던 내 전공, 생명과학으로.


생명과학은 말 그대로 ‘생명’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이다. 생명 현상을 연구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생명과학은 관심을 둔다. 이러한 생명과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꼽는다면, 바로 ‘진화’다. 모든 생물은 긴 진화의 시간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나타내므로 진화에 대한 이해 없이 생명과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생명 현상은 진화라는 기반 위에서 설명된다. 그렇다면 진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원리는 무엇일까? 바로 ‘자연선택’이다.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라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생존과 생식에 성공하는(자연선택되는) 과정을 오랜 시간 반복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자연선택을 기본으로 하는 진화의 원리는 현재 생물의 생명 현상을 너무나 명확하게 잘 설명해 주어서, 진화의 원리를 기반으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그 시도 중 하나가 바로 ‘진화심리학’이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심리를 진화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진화심리학은 현재 인간의 심리와 그로 인한 행동이 자연선택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는 음식에 대한 선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음식을 좋아하는데, 이는 식량이 부족했던 과거에 풍부한 칼로리를 제공하는 단 음식에 대한 선호를 가진 사람들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단 음식을 좋아했던, 살아남은 조상들의 후손들이다. 진화심리학은 음식에 대한 선호에서 나아가 두려움, 공포, 불안, 배우자 선호,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까지 진화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진화심리학을 통해 교사를 힘들게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심리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학생도 하나의 생물체로서 진화의 산물이니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왜 그럴까?


학교에는 늘 책상에 엎드려 있는 무기력한 학생들이 있다. 원하는 진로가 아직 없거나, 희망 진로가 성적과 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놀랍게도 학교 밖에서,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할 때, 또는 친구들과 놀 때, 이들은 무한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활동하곤 한다. 잠, 무관심, 무기력 등으로 에너지를 잔뜩 비축해 뒀다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쏟아내는 것 같다. 또 어떤 학생들은 에너지가 너무 과해서 모든 일에 의문, 불만, 간섭 등으로 폭발적인 힘을 뿜어낸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반항적인 이 학생들은 주로 부정적인 에너지를 학교에 발산한다. 그런데 이들 역시 놀랍게도 학교 밖에서,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할 때, 또는 친구들과 놀 때,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발산 방향을 자신만의 효율적인 방식으로 선택하는 것 같다.


사냥과 채집을 통해 식량을 얻었던 과거의 인류에게 목표가 확실하지 않고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에너지를 쏟는 것은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확실하게 사냥할 수 있는 것,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을 파악하여 선택적으로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무분별하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보다 식량을 잘 획득했을 것이고, 잘 생존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척박한 환경에 갇히거나,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등 계속해서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는 것보다 에너지를 쏟아서 현재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비축하거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방어 기제를 발달시켰을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에서부터 발달시켜 온 방어 기제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것이 학생들을 방황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꿈이나 목표가 없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에너지를 쏟아내기 힘들다. 원하는 꿈이 없으니 목표가 없고, 목표가 없으니 굳이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 아무것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는 것은 과거의 인류에게 생존을 떨어뜨리는 요소였을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무기력해진 것 아닐까 한다. 그들은 지금, 나중에 확실한 목표가 생길 때 뿜어내기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희망 진로가 성적과 큰 상관이 없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에너지를 비축하여 학교 밖에서 에너지를 사용한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 확실하지 않은 학업으로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학원, 실습 등 좀 더 확실한 노력으로 에너지를 쓰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우리의 살아남은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반항적인 학생들은 어떨까. 우리가 사는 현재는 과거와 상당히 다르다. 사냥과 채집에 노력을 기울여 성공하면 그날의 식량이 해결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지금 쏟은 노력이 곧바로 결과로 돌아오지 않는다. 10년, 20년 꾸준히 에너지를 쏟아내도 이후의 결과가 만족할만한 결과일지 확신할 수 없다. 노력과 결실 간의 간극이 너무나 넓어졌고, 결과의 불확실성도 너무나 커졌다. 그러니 학생들은 에너지를 쏟아도 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불안정한 상황에 늘 놓여 있다. 계속해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는 학생들은 과거에서부터 발달시켜 온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바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학교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 아닐까 한다. 대학과 미래를 끊임없이 얘기하는 학교는 불안정한 상황을 증폭하는 곳이니까. 무단이탈, 반항, 불만 등의 표현은 학생들이 작동시킨 방어 기제의 여러 모습이 아닐까.



교사는 왜 힘든가?


문제는 이러한 방어 기제를 학생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인류는 위험이나 공격으로부터 도망치기, 순종하기 등의 방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을 보호했고, 잠재 위험에 대해 과잉 반응하는 경향을 발달시켰다. 맹수를 만날 확률이 높은 야생의 환경에서는 위험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이 생존에 매우 유용했을 것이다. 알고 보니 그것이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어서 과잉 반응한 것이라 할지라도, 맹수한테 물려서 다치거나 죽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과잉 반응하여 도망치는 것이 유리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위험이 잠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과잉 반응하여 위험을 피하는 방어 기제를 발달시켰다.


나의 통제권에 들어오지 않는 학생들, 반항적인 태도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학생들은 모두 교사가 지도에 곤란함을 느끼는 학생들이다. 이 곤란함을 실제로 직면하는 위험으로 판단하고, 위험을 예상하는 상황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바로 불안이다. 불안은 잠재된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도망치는’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일종의 감정적 신호이다. 현재 처한 상황에 불안을 느낌으로써, 그 상황을 벗어나게끔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교사들은 학교에서 도망칠 수 없다. 해결 불가능하거나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도망치기’ 다음으로 유용한 전략 중 하나는 바로 ‘순종하기’이다. 도망칠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 순종하는 태도는 나에게 가해질 공격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교사는 지도가 곤란한 학생들을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 불안을 느끼지만,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순종하는’ 방어 전략을 사용하게 된다. 과거와 같이 목숨에 위해를 가하는 적을 만날 일이 거의 없는 현대에서 순종하는 태도는 부작용으로 낮은 자존감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는 슬픔과 우울을 초래한다. 그래서 교사는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닐까 한다. 벗어날 수 없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피할 수 없는 불안으로 우울을 경험하는 것이다. 반복되는 우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상처를 가득 입고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교사는 현장을 떠나게 될 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불안을 느끼고 우울해지는 것은 이들의 행동을 위험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이 어떤 형태로든, 일단은 교사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이를 위험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교사의 의도에 반하는 학생들의 행동은 위험이 아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괴롭히기 위해서, 무시해서, 나쁜 마음을 먹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행동의 이면에는 부족한 확신에서 오는 불안정함, 마음의 불안함이 가득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잔디처럼, 그들은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림 속에서도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나름의 방어 기제를 활용하고 있다. 안타깝고, 기특한 아이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흔들리며 버티고 있는 잔디를 꾹꾹 지르밟으며, 왜 꼿꼿하게 서 있지 못하냐고 윽박지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그 어떤 우울도 경험하지 않고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다. 교사가 학생을 사랑하는 만큼, 고민을 겪고 불안과 우울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과거의 인류에게 가벼운 우울은 전환기 역할을 해서 성공할 확률이 높은, 더 현실적인 전략을 찾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는 것이다. 우울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우울을 전환기 역할로 잘 활용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즉, 우울을 경험하지 않도록 노력하기보다는, 경험한 우울이 가벼운 우울로써 전환기 역할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 어차피 학교를 벗어날 수 없다면, 또는 벗어나고 싶지 않다면, 작은 행동 요령 하나를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바로 상황이 모두 끝나고 나서 ‘좋았다’고 외치는 것이다. 글로 써도 좋다. 학생들과 부딪치고 곤란했던 경험이 생긴다면, 이 경험이 힘들고 불안한 경험이 아니라, 배우고 나아가는 경험이었다고 계속해서 인식해 보자. 그리하여 앞으로 닥칠 새로운 불안을 새로운 배움으로 바꿔 보자. 우울은 가벼운 우울로 끝날 것이고, 전환기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무기력한 학생들에게 서운하고, 반항하는 학생들이 불안하다. 다만, 이러한 노력이 생각의 작은 전환을 일으켜주기를 바랄 뿐이다. 학생들이 교사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교사가 불안하고 우울한 것은 ‘못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우리는 모두 불안정하다. 우리는 모두 흔들리고 있는 잔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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