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두 살의 마침표"

광복이 되면 고국에 묻어달라던 마지막 한 마디

by 가을 밤나무 꽃

낯선 러시아 땅에서, 큰 키의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던 서른 두 살의 젊은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러시아에 갔을 때, 인접국인 폴란드에서 공부했던 때가 떠오르며 타국의 길거리 수많은 인파 속에서 길을 걷던 때를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안중근 의사를 인터넷에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문구는 '계몽 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적 아시아주의자'이다.


독립군 참모중장 사령관(3성) 이었던 안중근 의사는 1910년 이토히로부미 저격 후 심문을 받을 때 '이토히로부미의 15 죄악'을 제시했다. 내용 중에는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죄, 강제조약을 맺게 한 죄 등이 제시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부분도 함께 언급되었다.


- '한국 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한 죄'

- '소위 제일 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

-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목숨을 바치면서 인간의 기본권, 존엄성, 그리고 자유의 박탈과 침해로부터 국민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당시 주권의 상실과 모든 국가 자원의 착취와 강탈의 부조리함이 만연했던 것은 더욱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뛰어난 젊은이들은 외국 유학조차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었다.


학문을 겸비하였고 깊은 생각을 가진 젊은 지식인이

한 나라의 주권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목숨을 내놓을 각오하고 총을 집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애통하게 느껴진다.


광복이 오면 고국에 묻어 달라던 안중근 의사의 부탁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순국 직후 두 동생들이 찾아가 유해를 요청했지만 받지 못하였고, 지금도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내가 폴란드에 있을 때, 아우슈비츠(오슈비엥침)를 방문한 적이 있다. 관광도시로 유명한 크라쿠프에서 약 70Km 떨어진 곳에는 엄숙한 분위기의 수용소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수많은 방문객들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를 이동하며 설명을 듣는데, 대여섯살의 어린 아이부터 90세의 노년층까지 줄을 서서 방문한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그 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잠도 거의 잘 수가 없었다. 백 년도 되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 맞는지 그 끔찍함과 슬픔에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무너지고 일부만 남은 장벽 조차도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을 때를 생각하니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어느 나라이던 간에 나라 잃은 설움은, 주권과 인간의 기본권 그리고 자유의 박탈과 억압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또 무서운 것인지 다시금 느껴졌다.


80여년 전 우리나라 영토에서도 느껴졌을 두려움에 더욱이 고개가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서른 두 살이라는 나이는 어찌 보면 많은 것을 어깨에 메고 걷는 때다.


30년 동안 이루고 만들어 온 것들을 지키고,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시점이다.

어느 정도 사회에서 안정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때이기도 하고,

이따금씩 마음 한 켠에는 아직까지 어린 소년 또는 소녀의 여린 마음이 비치기도 하는 나이다.


무엇보다, 서른 두 살의 인생에는 앞으로도 한참 걸을 길이 많이 남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서른 두 살의 청년으로서 내가 평소 가지던 불평 불만들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어렵다 힘들다 느끼며 고민하던 모습들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115년 전, 서른 둘의 젊은이는 의연하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마침표를 찍었다.


2024년 광복 79주년을 맞아,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 나라가 서 있는 땅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생명의 희생과 땀이 묻혀 있음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또 기술이 발달한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한 발자국 나아가보리라 굳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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