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서른살의 회상, 안토닌에서 나고 자란 나의 삶
01. 서른살의 회상, 안토닌에서 나고 자란 나의 삶
내가 나고 자란 안토닌은 콘크리트 색의 도시다. 적어도 내 기억속의 안토닌은 그렇다.
바쁜 사람들의 걸음거리와 회색 빛의 얼굴들.
자세히 보면 그 얼굴들은 어두운 것 같기도, 평온한 것 같기도 하고 내심 기쁜 것 같아 보이다가,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표정들이 담겨있다.
집에 오는 길, 서른의 나는 가로등이 켜진 모퉁이를 지나 콘크리트색 담벼락을 지나온다. 초록 잎도, 단풍잎도 있으며 이따금씩 강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을 지나올 때도 있지만 안토닌은 회색 빛이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을 다니실 때에도 어머니는 밥이며 설거지며 집안 살림을 줄곧 해오셨다.
어릴 적 기억나는 어머니의 얼굴은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저녁상을 차리시곤 나와 레오를 불러 수저를 놓도록 하셨다. 아버지는 퇴근을 하시면 피곤한 얼굴을 감추며 우리를 반겨 주시고 화장실을 한번 들러 손을 씻고는 밥상 앞에 앉으셨다.
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하고, 유일하게 들려오는 뉴스 앵커의 딱딱한 말소리에 의지하여 반찬을 씹어 넘겼다.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는 다시 어머니의 일이었는데, 아홉 살의 나는 이런 풍경이 익숙한 탓에 그 날의 반찬이 무엇인지에만 관심을 가지는 어린 소녀였다.
꿈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였던 나는 어릴 적 화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가 또 다음에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이 두 분 모두 바깥에서 저녁까지 일하셨기 때문에 나와 레오는 방과 후 작은 학원을 몇 군데 돌다 와야 했다. 글짓기, 미술학원, 그리고 피아노. 없는 형편에도 우리가 배움의 끝에 해질녘에 집에 도착한 이유는 어린 우리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술과 피아노를 매우 좋아했고, 곧잘 두각을 나타내곤 했다. 하지만 집에서는 나에게 화가나 피아니스트가 되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리고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어머니는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그저 취미로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을 아끼시곤 했다.
안토닌의 다른 집의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은 학원을 두 세 개씩 다니거나 부모의 퇴근이 늦어질 때면 놀이터에서 배회하곤 했다. 부유한 집의 아이들은 발레와 클라리넷,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까지 다니며 저녁 일곱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똑같이 맞벌이를 함에도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어머니들의 담당인 것을 불공평한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은 내가 열세살이 넘어서 였다.
다니던 학교에서 ‘슈테이른’으로 교환학생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비행기 값과 체재비만 있으면 교육비는 모두 무료로 제공해주는 특별한 기회였다.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나를 슈테이른으로 보내기 위해 학교로 신청서를 제출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슈테이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열 세 살에 처음 가 본 슈테이른은 참 이상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