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 ..
이 책은 표지가 오렌지색이라서 어디에 놓아도 눈에 자주 띄었다.
그래도 뭐 뻔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문제들, 핸드폰이나 디지털 매체에 중독되어 산만해진 현대인들을 고발하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만 있었다면 이 책이 그리 유명세를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뻔한 말만 하는 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 엄청나게 새로운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이미 논란이 되었던 내용들을 통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될만하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서, 지금 우리가 겪는 집중력 부족은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그렇게 행동하도록 조종 및 강요당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감시 자본주의가 설계한 상자 속에서, 감각적인 쾌락에 몰두하며,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나, '비정기적 강화와 보상'에 절여져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비둘기는 아닌지 성찰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내용은 최근 나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어째서인지 인터넷 사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죠." 그는 자신이 소셜미디어에서 미국 대선 같은 사건의 사소한 정보들을 몇 시간이고 생각 없이 훑으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책 P. 47
물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말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1.5배속이나 심지어 2배속으로 영상을 돌리며, 소파나 침대에 누워서 접했던 정보들이 오랫동안 남은 경우는 많지 않았다. 책의 저자인 요한 하리는 '빠른 속도는 곧 적은 이해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 저기로 정보를 찾아 헤매는 '멀티 태스킹'은 '전환 비용 효과'를 일으켜서 무엇 하나에 깊이 있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이렇게 집중력이 무뎌지면, 소설과 같은 긴 텍스트를 읽을 힘이 떨어진다는 말은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소설의 수난은 결국 통찰과 개방, 공감능력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출되는 목소리의 결을 내면화한다. 타인의 내면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이 이야기가 우리의 의식 패턴을 다시 형성한다. 우리는 더욱 통찰력 있고 개방적이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반면 소셜미디어를 장악한 단절된 비명과 분노의 파편에 하루에 몇 시간씩 노출되면 우리의 사고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책 p. 138
그리고 집중력을 상실한 사회가 어떤 위험에 빠졌는지 살핀 부분은, 깊은 통찰의 결과로서 크게 공감이 되었다. 테크 기업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공익적 측면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용자의 시청 시간을 늘리기 위해 자극적인 가짜뉴스도 버젓이 끼워넣기도 하고, 알고리즘을 활용해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영상들을 청소년들이 매일같이 시청하고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청소년들이 매일같이 이러한 쓰레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이들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면 분노가 즉시 사라질까? 증거는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대규모 연구에서 백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어떻게 급진화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다수가 그 원인으로 인터넷을 들며 유튜브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웹사이트라고 말했다. 책. p.212
그렇다고, 이러한 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되니, 감시 자본주의와 빅테크 기업들에게 사람들의 집중력을 도둑질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이윤을 남겨야 하는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시스템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손자병법』의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인용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을 통해, 최소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명쾌한 해답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냥 우리 사회의 시스템과 집중력이 저하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아무런 대안을 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몇 가지 방법을 말하기는 한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필자는 집중력을 되찾기 위한 세 가지, 공동체의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감시 자본주의를 금지해야 한다. 고의적인 해킹으로 중독된 사람들은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주 4일제를 도입해야 한다. 늘 탈진 상태인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아이들이(자기 동네와 학교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되찾아야 한다. 집 안에 갇힌 아이들은 건강한 집중력을 발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책 P. 421
상당히 극단적인 제안이어서 과연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제안은 필자가 책 전체를 통해 얻은 결론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책을 읽지 않고 결론만 보면 말도 안 되는 망상으로 들릴 수 있으니 책 내용을 간단히 살피면서, 그가 왜 이러한 대안을 내놓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로, 감시 자본주의를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집중력 저하의 문제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앞서 말한 '감시 자본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빅테크기업들은 사용자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취약한 부분을 정교하게 조작하여 우리의 집중력을 갈취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심지어는 몸에 좋지 않은 음식도 권한다. 정제된 가공식품, 환경호르몬, 내분비 교란물질 등은 인간의 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이것이 집중력과 인지 기능 저하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필자의 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마다, 화면 너머에서 엔지니어 천여 명이 우리가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듯이, 우리가 가공식품을 포기하려 할 때마다 전문 마케터로 이루어진 팀이 우리가 다짐을 깨고 다시 돌아오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들은 우리가 의식하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이 건강하지 않은 음식에 긍정적이 되도록 작업해 왔다. 이들은 나의 뇌 건강이 아니라 자기들의 수익에 도움이 되도록 나를 프로그래밍했으며, 이렇게 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이 시스템이 다음 세대의 입맛을 왜곡하고 그들의 집중력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반드시 시스템의 작동을 멈춰야 한다. 책 P.320
물론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윤만 추구하는 감시 자본주의자로 제한한다지만, 이윤 추구가 생명인 기업의 생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집중력을 도둑질하는 사회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한 구조적인 시스템을 알면, 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조그만 변화라도 시도하게 될지 모른다. 물론 필자는 이러한 거대한 구조에 맞서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것은 '작고 얄팍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문제의 원인이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의지를 가지고 핸드폰이나 SNS를 줄이자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본적 해결책을 위해서는 '스타디움 라이트' 곧 공동체가 함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중력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 주 4일제 도입을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요한 하리는 집중력 저하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불안과 스트레스를 꼽는다. 현대인들은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한다. 뒤처진다는 것은 곧 생존의 위협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순한 불안이 아닌 경제적 위기와 같은 실질적인 빈곤은 더 큰 공포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불안하거나 공포에 휩쓸리면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렵다.
경제적 불안에 따른 과도한 업무 시간은 사람들을 과각성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상태는 집중을 방해하며,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불안에서 회피하려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결국 우리는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핸드폰이나 텔레비전을 무의식적으로 틀어놓는 것이다. 다른 SNS에 빠져들며 집중력을 도둑맞는 이유도 알고 보면 이 불안의 심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칫 이러한 매체에 빠져드는 것을 '몰입'으로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요한 하리는 이것이 진정한 몰입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상태를 '소방호스로 물을 들이켜는 것'에 비유한다. 즉,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우리는 정보에 ‘절여진’ 중독 상태가 되고, 개별 정보에 오랜 시간 깊이 집중하기는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브루스 알렉산더'의 '쥐공원 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이 실험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실험의 결과는, 천국과 같은 공원에 사는 행복한 쥐는 마약에 중독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쥐들조차도 자기에게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 알고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사람들도 무엇이 자기에게 좋은지 다 알고 있다. 핸드폰과 인터넷이 제공하는 자극적 정보에 절여진 삶이 자기를 좀 먹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그러한 중독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멈추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최근 이재명 정부는 4,5일제 도입을 논의하기도 하고, 안전수칙을 이행하지 않아 발생하는 산업재해에 대해 철저한 책임을 묻겠다고 팔 벗고 나섰다. 또한 전국민을 대상으로 긴급 생활지원금을 주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들도 일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러한 정책을 취하는 의도는 이 책의 의도와 정확히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전국민들이 불안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집중력을 향상시켜서 국민들이 더 행복해지고 생산성이 향상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셋째,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이 책의 저자는 어린아이들, 청소년들의 집중력 저하에 관심이 많다. 책을 처음 쓰게 된 동기 중 하나도, 전자기기 화면만 바라보는, 대자(godson)인 애덤이 원인이었다.
과거에 어린아이들은 부모 없이 밖으로 돌아다니며 놀았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철저한 부모님의 보호 아래 실내에서 갇혀 지며 홍수처럼 쏟아지는 인터넷 정보에 절여지며 학습을 강요받는 것이다. 또한 형편없는 인스턴트 음식에도 절여진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의 홍수와 형편없는 음식들이 아이들의 집중력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인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고 한다.
학교에 근무하다 보면, 많은 학부모들이 염려하는 것이 자녀들의 핸드폰 사용임을 보게 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고 공부를 더 하기를 원한다. 공부를 못하는 원인을 핸드폰 사용에서 찾기도 한다. 공부를 잘하다가 기피하게 된 원인이 핸드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등학교 선택에서 핸드폰을 철저히 관리하는 곳을 선호한다.
하지만, 핸드폰만 잘 관리하면 아이들이 공부할까? 절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이 핸드폰에 과몰입하게 된 원인을 그대로 둔 채로 핸드폰만 치운다고 한들 아이들이 공부에 집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십중팔구는 아이는 다른 도구를 찾을 것이다. 어쩌면 핸드폰보다 더 위험한 것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문제의 원인이 공부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불안인데, 그 스트레스는 그대로 둔 채, 핸드폰을 금지한다고 집중력이 상승할까? 더 많은 시간 일한다고 집중력이 커지는 것이 아니듯, 더 많은 시간 앉아 있는다고 공부의 집중력과 효율성이 커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 ADHD 진단율이 증가하고 또한 집중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은 이처럼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실내에 가두고, 나쁜 정보와 나쁜 음식에 절여진 채로 공부를 강요받는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어린이들은 자연 속에서 뛰놀고, 질문하고, 주변을 탐색하며 스스로 유능해지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잘 동의는 되지 않겠지만, 사실 어른들 대부분은 그렇게 자라왔다. 지금같은 육아와 교육방식은 인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정보는 대부분 매우 자극적이고 흥미를 끌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지금 이 정보를 클릭해봐. 안 보면 손해야”라는 식의 유혹은, 마치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던 사이렌처럼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붙든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저항하지 못한 채 정보의 파도에 휩쓸리고, 결국 방향을 잃은 난파선의 선원처럼 표류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하리'는 가끔은 강제로라도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하며, 독자들에게도 이런 삶을 권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 하리는 책의 '에필로그'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 년 동안 집중력을 연구한 '제임스 윌리엄스'의 말을 빌려 와 집중력의 종류가 다음과 같은 3가지가 있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큰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데이라이트(Daylight)'라고 한다.
1) 스포트라이트(Spotlight) – 눈앞의 일에 단기적으로 몰입할 때 발휘되는 집중력
2) 스타라이트(Starlight) – 장기적인 목표나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
3) 데이라이트(Daylight) – 장기적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 계획을 실천하는 집중력
이는 일상 속에서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을 해내기 위한 집중력을 말한다. 집중력을 도둑맞은 사람들은 바로 '데이라이트'를 상실하고 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서핑, 텔레비전 등으로 빠져간다는 것이다. 예컨대 책을 쓰고 싶다는 꿈은 있지만, 정작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하는 일은 번번이 미뤄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에서 말하는 '시간관리 매트릭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만, 대안은 다르다.
'스티븐 코비'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두었다면 '요한 하리'는 공동체적인 대응을 요구한다. 그래서 네 번째 집중력, '스타디움 라이트'를 제안한 것이다.
4) 스타디움라이트(Stadium Light) – 사회 전체가 함께 주목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할 때 발휘되는 집단적 집중력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는 거대한 감시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맞서, 함께 모여 변화와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부족할 때, 공동체는 연대와 공감의 힘으로 그것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야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작고 미약해 보일지라도, 함께 집중하고 함께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쌓이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수 있다고 요한 하리는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점점 더 피로하고 산만한 상태에 갇힌 채, 주체적인 삶을 잃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