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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어깨, 디딤돌 인문학

고등학교 교사의 인문학 수업 및 실천이야기

by 양심냉장고

인문학의 개념


학생들에게 ‘인문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어떤 학생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학생은 ‘사람을 소재로 한 문학’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인문학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이라면, ‘역사나 철학, 문학과 같은 학문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배우는 것 아니냐’고 말을 한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추상적이다.

사람들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은 진짜 지식이 아니다. 진짜 지식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메타인지(Meta Cognition)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한다. 메타인지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인 위치에 놓고 성찰하는 힘인데,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필요한 역량이다.

다시 돌아와서, 인문학이 무엇인지 대충은 아는 것 같은데, 무엇이라 설명하기 어려운가? 그럼 인문학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문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안다고 착각은 하는데,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인문학은 처음에는 ‘천문학(天文學)’과 대비되는 표현에서 시작되었다. 주역(周易)에는 ‘천문을 살펴 때의 변화를 알아내고, 인문을 살펴 천하의 교화를 이룬다’는 말이 있는데, 이로부터 인문학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천문(天文)’은 하늘의 운행 원리를 뜻하고, ‘인문(人文)’은 인간 사회의 질서와 문화를 의미한다. 즉, 인간의 삶과 사회를 연구하여 조화로운 삶을 이루게 하는 것이 인문학(人文學)의 본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모호하다. 그렇다면 또한 조화로운 삶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영어로는 ‘Humanities’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 ‘Humanitas’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Cicero)는 ‘Humanitas’를 “인간다움, 교양, 지적 성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했다고 하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를 바탕으로 고전 문학과 철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인문학(Humanities)이 정립되었다고 한다.

사전적 의미로 인문학은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인간의 근원 문제, 가치, 자기표현 능력 등을 이해하기 위한 종합적인 연구를 포함하며, 철학, 역사, 문학, 예술, 윤리학 등 인간의 가치와 존재를 깊이 성찰하는 분야를 아우른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범위가 너무 넓고 포괄적이다. 조금은 더 어려워진 느낌이다. 아주 쉬운 개념으로 인문학을 설명할 수는 없을까? 최근 인문학에 대해 관심이 늘면서 인문학의 의미를 정의하는 말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그래도 가장 맘에 드는 정의를 찾았다.


“인문학은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가’에 대하여 고찰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기원과 삶의 방식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더 쉽게,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찾는 것이며, 그리고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학이나 역사, 철학은 물론 과학을 동원하기도 하고 신학을 동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별로 신경쓰지 않고 싶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더 관심을 두고 산다. 이런 현상을 『트렌드코리아 2025』에서는 ‘아보하’라는 말로 설명한다. ‘아주 보통인 하루’의 개념으로, 오늘 하루를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인문학이다. 금방 말하지 않았는가? 인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아보하'도 인문학적 성찰로 나온 하나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질문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세계관(Worldview)이나 인간관을 형성하며, 그 세계관 속에서 가치관(Values)을 정립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가치관 속에서 올바른 삶을 결정하는 윤리관(Ethics)이 확립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관 위에 형성되지 않은 가치관이나 윤리관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그런 것 없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맞다. 오히려 이런 질문은 시킨 일만 충실하게 해야 하는 팔로워(follower)에게는 독(毒)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관과 가치관, 윤리관 안에서 살아간다. 한 사람도 예외는 없다. ‘인문학 같은 거 나는 모르고, 돈버는 것이 유일한 인생의 가치이자 목표’라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그는 이미 유물론적 세계관 안에서 물질중심적인 가치관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가치관 안에서 돈을 벌기 위한 효율적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윤리관과 도덕개념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해야 삶의 현장에서 갈등이 줄어들고 소신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자신의 세계관, 가치관, 윤리관 아래 결정하고 행하는 삶이 조화롭다.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윤리관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면 그는 성인군자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세계관 아래, '악법도 법'이라는 가치관을 지키고자 불합리한 독배를 마시는 실천을 했다.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위대한 철학자라고 추앙한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관과 가치관, 윤리관이 완벽한 일치를 경험하기 쉽지는 않다. 우리는 소시민으로서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굴종적인 선택과 삶을 살아야 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소신이 있고 일관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성찰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하고,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

결국 인문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환원된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래서 결국, 나의 본질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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