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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인문학

인문학의 도구 : 문학 1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by 양심냉장고

지금까지 인문학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질문하고 탐구한다.
인문학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고 탐구한다.
인문학은 인간이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지 질문하고 탐구한다.


결국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게 있는 것인지도 논란은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이땅에 태어난 목적과 본질이 있다고 가정을 하자.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탐구하기 위해서, 최근에 많이 활용하는 도구는 '과학'인 듯 하다. 뉴튼의 고전역학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 그리고 빅뱅이나 양자역학 그리고 끈이론과 같은 것들은 모두 세계의 기원, 근본을 탐구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생물학적 이론인 진화론이나 지적설계론은 과학으로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인문학의 도구라고 하면, 문학과 역사, 철학을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주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문학은 작가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주로 보여준다. 물론 문학은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소재로 삼기는 한다.

역사는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철학은 직접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사는게 바람직한 것이냐'고 질문한다. 철학이 어려운 게 아니다. 질문하는 것이다. 어떤 세계관과 인간관을 가질 것인지, 어떤 가치관과 윤리관이 올바른 삶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고 질문한다. 무엇이 정의인지 질문한다. 무엇이 행복이냐고 질문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은 악이냐고 질문한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답을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누군가 답을 준다고 하면 솔깃해진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질문하고 찾으라고 하면 조금 귀찮아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 이제 질문은 필수다. 누군가 주는 답만 찾으면, 인공지능보다 나은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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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문학으로 비상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인문학의 대표주자인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인문학은 문학으로 비상한다. 제목이 좀 어렵다. 문학은 ‘비유(比喩)와 상징(象徵)’을 활용하여 세상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만든 말이다. 비유와 상징은 무엇인가? 무엇을 무엇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법들이다. ‘네 마음은 호수’라는 한 마디로 문학은 오만가지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나는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문학으로 경험했던 인문학적인 질문과 답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대개 문학은 상상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읽는 『마당을 나온 암탉』

학기 초에 아이들과 만나면 아이들의 이름과 뜻을 묻는 걸 좋아한다. 이름은 부모님의 철학이 담긴 것이라고 말한다. 부르기 좋으라고만 만든 게 '너의 이름'은 아니다. 심지어 비싼 돈 들여서 작명소에서 만들기도 하는 이유는 이름에 담긴 힘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매일 학교와 학원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할 줄 알지,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별로 관심이 없다.


'쓸데 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해라! '
'쓸데 없는 생각 말고 알이나 많이 낳아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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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미 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은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동화책이다. 그러나 이 동화는 앞에서 살핀 인문학의 다양한 질문에 충실하게 답하는 탁월한 이야기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작가는 우리들에게 난종용 암탉의 일생을 알려주고자 이 동화를 창작했겠니?
아니다. 너희도 혹시 닭장과 같은 교실 안에서 교사가 던져주는 일방적인 지식을 받아 먹고
좋은 대학이나 가려는 목표로 하루하루 사는 것은 아니냐?”


물론, 대부분의 난종용 암탉은 그냥 그렇게 산다. 그렇게만 살아도 나쁘지는 않다. 암탉이 사료를 잘 먹고 건강한 알을 많이 낳듯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삶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못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꿈을 꾼다. 불가능한 꿈을 꾼다. 그런데 사실, 그런 꿈을 꾸면 많이 아프다. 죽을만큼 아플 수도 있다. 그래서 아무나 그런 꿈을 꾸지는 않는다.

주인공, 난종용 암탉은 가져서는 안 되는, 가질 수 없는 꿈을 꾼다. 시작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다가 양계장 밖 나무를 본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잎싹을 보면서 자신도 저 잎싹처럼 살고 싶다는 꿈을 꾼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을 ‘잎싹’으로 재정의 한다.

잎싹.png


이름을 재정의하고, 첫번 째 꿈을 꾼다. ‘잎싹’이라고 이름을 짓고 나니, 더욱 자신의 삶이 고통스럽다. 그 고통이 깊어져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잎싹’은 죽을 지경에 이를 만큼 고민했기에 양계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청둥오리의 알을 품어 생명을 살리고, 족제비의 위험으로부터 아들을 지켜내 훌륭한 파수꾼으로 키운다. 마당을 나가 알을 품고 싶다는 두번 째 꿈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는 제 몸까지 족제비에게 맡기고 죽는다. 마지막 소원이었던 하늘을 난다.


문학은 이러한 ‘암탉’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정말 많은 질문과 답을 우리에게 던진다.


나의 이름은 무엇인가?

나의 본질은 무엇이고 꿈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본질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가?


실존이냐 본질이냐

난종용 암탉은 본질적인 삶에 대한 고민을 한다.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당에 사는 암탉이 자기의 병아리를 까서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본 후에 그런 생각을 한다.


‘왜 나는 닭장에 있고, 저 암탉은 마당에 있을까?’


이게 인문학적인 질문이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지?'

그런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암탉은 양계장 밖의 아카시아 나무의 잎사귀를 보고, 드디어 자기의 꿈과 소망을 만든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잎싹’이라고 한다.


이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은 세상에 또 없을 거라고 믿었다. 바람과 햇빛을 한껏 받아들이고, 떨어진 뒤에는 썩어서 거름이 되는 잎사귀, 그래서 결국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게 잎사귀니까. 잎싹도 아카시아 나무의 그 잎사귀처럼 뭔가를 하고 싶었다.


철학에는 ‘실존’이 먼저냐? ‘본질’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있다. 실존이 먼저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은 백지와 같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한다. 그렇기에 이후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본질’이 우선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본질이 있으며 이에 따라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쟁이 무엇이 올바른지는 여기서 더 깊이 논의하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두 관점 동일하게, 인간은 자신의 삶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잎싹'의 경우 타고난 본질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깨달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잎싹'은 자기의 삶에 책임감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불가능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다만 불가능한 꿈을 꾸니까 고통이 뒤따른다.

잎싹이 선택한 삶은 편한 삶은 아니다. 그러나 잎싹은 자신의 본질이, 양계장 갇혀 있는 삶에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본질은 양계장에 갇힌 ‘난종용 암탉’이 아니라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이며, 또한 '알을 품고 새끼를 낳는 존재'라고 자신의 본질을 재정의 한 것이다.

잎싹이 아무런 생각없이, 농장주가 제공하는 사료나 먹고 '무정란'이라도 열심히 낳았으면 별 문제가 없다. 다른 닭들은 다 그렇게 산다. 그게 가장 평범한 삶이다. 하지만 ‘잎싹’은 평범한 삶을 거부한다. ‘잎싹’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짓고 나서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그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잎싹'은 자신의 본질이 '새'라고 재정의 했다. 힘들어도, 죽어서도 그는 날아다니는 '새'가 되길 원했다.


꿈은 혼자서 이룰 수 없다.

'죽은 닭을 버리는 구덩이'에서 겨우 눈을 뜬 ’잎싹‘은 한 소리를 듣는다.


일어서! 걸어 보라고!
넌 안 죽었어. 빨리 일어나라니까!


'청둥오리'였다. 마당에 사는 나그네. 그도 사는 게 녹록치 않다. 하지만, 청둥오리는 타인의 불행을 방관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이 '암탉'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족제비에 대한 미움때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알 듯이, '사람 인(人)' 자는 서로 돕는 존재임을 형상화 한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강인하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도 극심한 불안과 우울 앞에서는 나약하다. 그때에 위로와 힘을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그런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도 필요하다.

위로와 힘을 주는 이가 전능한 존재, 하나님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왜 나약하게 신에게 의지하느냐고 말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교만한 소리다. 솔직히 자기 힘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자기 옆에서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어린왕자’에게는 ‘여우’가 그런 존재였다. 한없이 초라해지고 비참해진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아주 작은 별과 그 별에 사는 장미가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 것인지 알려준다.

‘잎싹’에게는 ‘청동오리’가 그런 존재이다. 사실 청둥오리도 행복하지는 않다. 그는 족제비에게 날개를 잃었고, 사랑하는 짝을 두 번이나 잃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상처를 입으면 세상을 더 저주하고, 자기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망하며, 타인의 불행에 더 무관심해 지기도 한다.

하지만 청둥오리는 거듭되는 아픔과 좌절 속에서도 자기의 삶에 끝까지 충실했다. ‘잎싹’을 살리고 잎싹이 '어, 어디로 가지?'하며 머뭇거릴 때 헛간으로 데리고 간다. 자기가 욕을 먹을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사별의 아픔도 이겨내고 다시 사랑한다. 다시 반복되는 불행 앞에서도 '잎싹'을 존중하고 자기의 ‘아들’을 살린다. 그리고 자신은 족제비에게 죽는다.


청둥오리는 삶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비겁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마당의 식구들

마당에는 늙은 개가 산다. 오리들이 산다. 수탉과 암탉이 산다.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이런 저런 사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어린왕자’가 별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보여주듯이, 마당에 사는 동물들도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다.


열심히 사는 늙은 개는, 마치 '어린왕자'의 등대지기를 닮았다. '어린왕자'에서는 등대지기의 최후가 나타나진 않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는 '불독'으로 교체된다. 정말 '개'처럼 살다가 쓸모가 다하여 버려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타인이 규정한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는 존재들이다.

원래 개의 진짜 본질은 '늑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의한 본질이 아니라 타인이 부여한 본질, 그런 임무에만 충실하면 우리는 언제든 용도 폐기 될 수 있다. 요즘같은 불경기에 특히 40, 50대 직장인들이 많이 불안하다는 소식들이 들린다.


집오리들은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자기의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불안해 하며,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정해진 규칙 안에서 순종적으로 산다.


쫓아 버려! 병을 옮길지도 몰라
무슨 소리! 너는 양계장 암탉이잖아. 그러면 닭장에서 알이나 낳아야지!


마치 '부산행'이라는 영화의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나마 갑갑한 자신의 일상이 침범당할까 걱정하는 소시민들. 우리 주변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다. 조금은 이기적이고 '남들 사는대로 살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마당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많은 오리들처럼 사는 게 가장 평범한 삶이다. 사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기도 하다. 오리처럼만 살아도 남부끄럽지 않게 살 수는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오리들은 선하다. 자기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나중에는 오리를 잘 키운 ‘잎싹’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우두머리가 물에 들어가려고 깃털을 매만지다가 물었다.
그 애는? 안 보이는데 혹시 ....
혹시 죽은 건 아니냐고 묻는 거였다. 잎싹은 때마침 힘차게 날아오르는 초록머리를 가리켰다. 우두머리가 놀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초록머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잎싹을 향해 고개를 조금 숙여 존경을 표시했다.


솔직히 오리들처럼 만큼이라도 살고 싶다. 날지는 못해도, 질투하고 시기하기보다는 타인을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지키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오리들처럼 산다면 가장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삶이다.


수탉은 무리의 지도자를 상징한다. 권력자이다. 수탉의 말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가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수탉’은 선하다 악하다 말하기 어렵다.

수탉은 '잎싹'을 헛간에서 나가라고 말하지만, 이전에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청둥오리' 나그네를 헛간의 일원으로 받아준 일이 있다. 그러니 또 '잎싹'이 불쌍하다고 무조건 받아줄 수는 없다.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적용하면, 외국인 난민을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유럽과 캐나다가 외국인 이민자로 사회적 갈등이 극심하다고 한다.

수탉의 입장에서는 그 질서를 깨뜨리고 등장한 ‘잎싹’의 존재를 바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수탉은 나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는 아니다.

조직의 리더는 때로는 그럴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게 마키아벨리적인 리더십이라고 해도, 자기가 이끄는 조직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다만 그 결정이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주인공인 돼지 '나폴레옹'은 자신의 욕심만 채웠기에 몰락했다.

그런 점에서 수탉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반반이 될 수 있다. 자신들의 가치관과 윤리관에 따라 다양한 생각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밭은 얼마든지 있었다.

우리는 지나치게 마당 안에서만 산다. 마당을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 안다. 그 마당이 전부이며 그 이상의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남들이 정해준 삶이 자신의 실존이자 본질이라고 믿으며, 순응하며 산다. 하지만 ‘잎싹’은 알게 된다. '헛간'이 아니어도 지낼 곳은 많았고, 먹을 것도 널렸다. 주인이 내려주는 사료가 아니라 두엄더미에는 자신이 직접 잡아 먹을 수 있는 '지렁이'도 있었다.

잎싹은 텃밭에서 나왔다. 그런데 밭은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당에서 멀기는 해도 밭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녀를 떠나보내는 것이 진정한 사랑

'잎싹'은 알을 품고 싶다는 소망을 이룬다. 그리고 '초록머리'를 품어 낳는다. 초록머리는 자기와 다른 오리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 기른다. 하지만 오리는 닭이 아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외롭다. 외로운 초록머리는 방황을 한다. 엄마를 떠나 오리들이 사는 마당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초록머리'는 환영받지 못한다.


어리다는 건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아가, 너도 이제 한 가지를 배웠구나.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란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야.


그렇게, '잎싹'은 '초록머리를 사랑으로 키운다. 같은 족속이 아니어도 서로를 이해하며, 족속 이상의 사랑으로 키운다. 그러나 그렇게 성장한 '초록머리'는 이제 어엿한 파수꾼으로 자라고, 곧 떠나는 순간이 왔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분리시키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부부야 한 몸을 이루는 게 중요하지만, 어디 자식과 한 몸을 이루겠는가? 자식은 성장하면 과감히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다.


엄마 내가 떠나길 바래?
잎싹은 초록머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야지. 네 족속을 따라가서 다른 세상에 뭐가 있는지 봐야 하지 않겠니? 내가 만약 날 수 있다면 절대로 여기에 머물지 않을 거다. 아가, 너를 못 보고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만, 떠나는 게 옳아. 가서 파수꾼이 되렴. 아무도 너만큼 귀가 밝지 못 할 거야.
나는 안 떠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초록머리가 잎싹의 날갯죽지에 머리를 묻었다.
하고 싶은 걸 해야지. 그게 뭔지 네 자신에게 물어 봐.
엄마가 혼자 남을 텐데. 마당에 갈 수도 없고.
나는 괜찮아. 아주 많은 걸 기억하고 있어서 외롭지 않을 거다.

족제비는 나쁜놈인가? 좋은 놈인가? 이상한 놈인가?

인간이 본디 선하게 태어나는가? 아니면 악하게 태어나는가? 이른바 성선(性善)과 성악(性惡) 논쟁이다.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은 과학으로 입증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냥 '설'이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동양의 성리학(性理學)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성리(性理)를 파자(破子)하면 곧 마음 심(心)이 생기는(生) 이치(理)를 탐구한다는 소리 아닌가? 특히 '성리학'의 '사단칠정론'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꽃을 피운다. 대체로 '인의예지'와 같은 사단은 선한 것이고, '희노애락애욕오'와 같은 칠정은 선하지 않은 것, 탁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무엇인 주된 중심이냐를 가지고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싸운 것이다.

갑자기 『마당을 나온 암탉』을 말하다가 '성리학'의 음양오행이나 사단칠정론이라니 좀 격이 안맞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사단칠정론'이 별거 아니다. 이것도 결국은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의 논쟁이다. 선하다면 왜 그런지, 악하다면 왜 그런지를 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개인의 수양은 물론 정치 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논의하는 것이 성리학의 핵심일 것이다.

성리학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족제비는 악한 존재인가'를 다시 질문한다. 그럼 '악하다'의 기준은 무엇인가? 족제비가 악하다면 그 기준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은 아이들에게 '족제비'가 나쁜 녀석인가 물으면 대개, 나쁘다고 말한다. 대부분은 '잎싹'의 관점에서 동화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족제비'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가? '족제비'는 나쁜 놈인가? 아니다. 그는 그냥 배가 고팠을 뿐이고, 자기 새끼들을 기르기 위한 모성애였다고 한다. 족제비의 관점에서 보면, 족제비는 지극히 이타적이고 선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관점에 따라 '악'의 기준이 달라진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악'을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하면 우리 사회는 다 자기 관점에서만 선악을 판단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공동체는 사회적 합의 하에 '선과 악'의 기준을 만든다. 대개 그 기준은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 여부로 하거나, 아니면 정의란 무엇인가의 관점에서 '자유', '행복', '미덕'이라는 세 가지 기준에서 결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 합의 하에 만들어진 선은 장려하고, 악은 징벌한다. 도덕과 규범, 그리고 법을 통해 이것을 체계화 한다.


다시 또 돌아가서, '족제비는 나쁜 놈인가?'

족제비는 이기적인가? 족제비는 배고프지 않을 때 사냥을 하지 않았다. 자기 새끼들을 위해서만 사냥을 한 것이다. 이유없이 생명을 해치지는 않았다. 그럼 나쁜 놈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잎싹'도 자기의 새끼를 지키려고 족제비에게 짚더미 속에 들쥐가 산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질문을 하면, 사실 족제비는 알 수 없는 놈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다 자기 편한대로 해석한다. 그렇게 산다. 조금은 이기적인 듯하다.


꼭 '잎싹'처럼 살라는 건 아니다.

이 동화를 읽고, 꼭 잎싹의 삶만이 가치있다고 말 할 것은 없다.

아무리 작가가 '잎싹'의 삶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제시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마음대로 읽을 자유가 있다.

'돈키호테'의 명언으로 마무리 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견디고,
용감한 이조차 가지 못한 길을 가네...
돈키호테.png


암탉 '잎싹'은 '돈키호테'를 닮았다.

그렇기에 '돈키호테'처럼 살지 말지 결정하는 건 각자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잎싹'처럼 살기를 바라지만, '오리들'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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