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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와 곰

인문학의 도구 : 문학 2 원형과 무의식

by 양심냉장고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원형과 집단무의식을 보여준다.

원형(Archetype)과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이론을 제시한 융의 심리학에 비추어 보면,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어떤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단군신화’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단군신화'는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이야기로, 환웅은 비, 구름, 바람이라는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천상의 무리 3천 명을 거느리며, 삼위태백이라는 공간으로 내려온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유난히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지 그 뿌리를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손인 동시에 지상에서는 웅녀(곰)의 아들임을 말하는데, 이는 하늘의 아들로서 고귀한 존재인 동시에 곰같은 민족성을 갖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을 하늘의 후손으로 상징하며, 곰의 성향을 가진 민족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늘 신웅, 즉 환웅천왕에게 와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원했다. 신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이것을 먹으라. 그리고 백날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소원대로 사람의 몸으로 바뀌어지리리라.” 일연, 『삼국유사』

호랑이의 말, '정의란 무엇인가?'

백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쑥 한 줌과 마늘 20개로 버티기'

곰과 호랑이가 인간, 여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현대에 와서 쑥과 마늘의 효능을 말하기도 하지만,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부여한 과제는 좀 이상하다. 왜 굳이 100일이어야 하고, 쑥과 마늘이어야 하며, 또 왜 햇빛을 보면 안되는가?

물론 이 이야기는 신화이니까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있기는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럽고 힘든 과제임은 분명하다. 여자로 거듭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호랑이는 환웅이 명한 과제를 포기한다. 어쩌면 과감히 벗어던진 것일 수 있다. 반면 곰은 삼칠일만에 여인이 되어 단군의 어머니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것이 몇 가지 있다.

환웅은 분명 100일이라 했는데, 호랑이가 나가자마자 삼칠일(21일) 만에 곰을 사람으로 만든다. 환웅은 처음부터 동물을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환웅은 처음부터 누구를 아내를 삼을지 마음에 결정을 하고 시험 과제를 준 것은 아닌가? 이런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그래서 시험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호랑이도 정의롭지 않은 게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환웅의 권위 앞에, 처음에는 아무 말 못하고 게임에 임한다. 하지만 게임이 되지 않는다. 화가 난다. 원래 곰은 동굴에서 지내며 잡식을 한다. 환웅이 곰에게 준 과제는 고통이 아니라 일상이었을 것이다. ‘누워서 떡 먹기’이다. 이건 공평하지 않다! 그래서 뛰쳐 나갔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는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가끔 얼굴을 비치기는 해도 여전히 호랑이 같은 여자는 금기다. 그래서 호랑이 발톱을 드러내는 윤씨는 폐비가 된다. 호랑이 같이 살았던 폐비 윤씨의 아들은 연산군이었다.


곰의 말, '나도 할 말이 많다.'

호랑이를 이기긴 했지만, 곰도 억울하긴 마찬가지다. 환웅에게 쌓인 감정이 있을 법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게 뭐 그리 유세라고.’ 무슨 남자가 숙제 하나 던져주고 무소식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과제이긴 하지만, 100일을 기다리는 마음도 답답했을 것이다. 사실 백일은 오랜 시간을 의미하는 추상적인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서정주의 ‘신부’라는 시가 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 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 '신부'


환웅을 기다리는 곰의 마음이 위와 같았을 것이다.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답답하다. 처음부터 자기에게 유리한 시험인지라 호랑이를 바라보는 마음도 불편하다.

그런데 환웅은 호랑이보다 왜 곰을 더 선호한 것일까? 곰도 사납기로는 호랑이 못지 않다. 다만 호랑이보다는 조금 더 속깊어 보이고, 쉽게 발톱을 드러내지는 않는 것 같기는 하다. 겨울잠을 자면서 에너지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마치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신비감도 있다. 그래서 그런가? 어쨋든 환웅에게 곰은 조금 더 신비감이 있었나 보다. 무엇보다 웅녀는 '단군'이라는 아들을 얻는다.


이러한 환웅의 생각은 우리 한민족의 전통적인 여성상이 되었다. 융이 말한 '원형'과 '집단무의식' 이론에 의하면, 그러한 ‘단군신화’ 속의 전통적인 여성상은 우리 민족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웅녀(곰)는 이후 인고와 기다림의 상징이며 훌륭한 아들을 키운 상징이 되어 우리 민족의 무의식 속에 이어져 왔다.

‘정읍사’와 같은 고려가요로, 『춘향전’』과 『심청전』 같은 소설 속에서, ‘진달래꽃’과 같은 현대시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그 모양을 드러낸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꾸준히 이어져 왔음을 학교에 다닐 때 문학 시간에 배웠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賢母良妻)로 율곡 이이라는 아들까지 잘 잘키운 여인으로, 가장 곰을 닮은 여인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교실에 사진을 걸기도 했다.


지금 교실 벽에서는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의 상징인 화폐 속에 아들과 함께 살아있다.


선화공주와 '서동요'

가장 오래된 서정시가 중 하나로 ‘서동요’가 있다. 신라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한 낭만적인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상당히 살벌한 배경설화를 가진 노래다. 신라인의 관점에서야 어떻든,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성희롱이고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살해한 범죄의 노래이다.

설화의 내용과 노랫말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을 끌어 들여 사통(私通)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노래를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서동 본인은 아이들 뒤에 숨어서 이런 노래를 퍼뜨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선화공주는 아버지 진평왕과 신하들의 미움을 받아 귀양길에 오른다. 처절한 정신적 신분적 몰락을 경험했을 것이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다. 간절히 아들을 원했다. 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첫째 딸인 '선덕'을 왕으로 만든다. 우리가 잘 아는 '선덕여왕'이다.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셋째로 태어난 선화는 아들로 태어나지 못해 늘 죄인이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아버지의 맘에 들고자 눈치도 빠르고 참 '착한 여자'로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멀리 백제까지 소문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선화는 어이 없는 소문으로 한 순간에 버림을 받는다.

이렇게 말하면, 영웅이 아름다운 미인을 얻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던 남학생들은 조금 당황한다. 그런 관점에서 서동요를 해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대부분 서동요는 서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가르친다. 선화의 입장에서 서동요를 해석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동요’는 ‘선화의 관점에서도 해석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몽룡과 '춘향전'

환웅은 곰이었던 웅녀를 백일 동안 기다리라 하고, 서동은 한 여인의 삶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비록 소설이지만, 춘향전의 이몽룡도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긴 마찬가지이다. 일편단심으로 이몽룡을 기다리며 춘향이는 옥중에서 죽을 결심을 한다. 그런데 이몽룡은 죽어가는 춘향 앞에서도 자신이 암행어사임을 밝히지 않는다. 거지꼴로 찾아온 이몽룡을 본 춘향은 절망했을 것이다. 그날 밤에 자결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다음날 이몽룡은 암행어사 출두를 하고도 또 춘향이를 시험한다.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도 변조하고 유혹을 한다. '사또의 수청은 거절했지만 어사또의 수청은 어떻냐'고 묻는다. 그런 잔인한 시험이 연거푸 반복되고 나서야 이몽룡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솔직히 이 상황을 춘향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몽룡의 뺨을 한 대 갈겨버릴 일이다. 목숨 걸고 기다린 남자가 자기를 의심하며 계속 시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런 남성을 여성들은 신뢰할 수 있을까? 아무리 조선시대라고 해도 이정도로 사랑을 시험하는 것은 잔인하고 비겁한 일이다.


춘향아! 이몽룡보다 괜찮은 남자들 많다. 정신차려라!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조선 시대를 살아가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여성들이었다. 신사임당은 흔히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남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상당 기간 친정에서 머물며 학문과 예술 활동을 이어갔으며, 전통적인 부부관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과거 급제에 실패한 인물로, 경제적으로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 신사임당은 가정을 실질적으로 이끌며 자녀 교육에 힘썼고,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펼쳐나갔다. 신사임당은 자신의 사후에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 것을 당부했는데, 이는 단순한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가정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남편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을 원치 않았음을 시사한다.

남편과의 갈등은 아들 율곡 이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율곡은 불우한 어린 시절에 회의를 느끼고 한때 승려가 되겠다고 가출하기도 했다. 신사임당이 아들에게 학문과 도덕적 가치관을 가르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신사임당은 아들을 훌륭히 키워낸 어머니로서 위대한 ‘현모양처’로 추앙받는다.

현재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은 대한민국 화폐의 주인공이다. 신사임당은 5만 원, 율곡 이이는 5천 원에 등장한다. 화폐의 모델이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좀 과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신사임당은 그의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5만원의 주인공이 된 것인가? 아니면 아들을 잘 키운 현모양처의 상징인 것인가?



반면, 허난설헌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여류 시인이었다. 그녀는 일찍이 신동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8세 때 벌써 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15세 때는 중국 당·송나라의 유명한 시인들과 견줄 만한 작품을 창작할 정도로 뛰어난 감수성을 지녔다.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학문보다는 가정에서 순종적인 역할을 요구받았지만, 허난설헌의 재능은 이를 뛰어넘을 만큼 탁월했다. 그녀는 화려하면서도 애절한 시풍으로 유명했고, 특히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의 문학적 재능은 남편과 시댁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녀는 15세에 결혼했으나, 남편 김성립은 그녀의 학문과 예술적 감각을 이해하지 못했고,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시어머니 또한 그녀를 가정의 일에 전념하지 않는 여인으로 여겨 냉대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결혼 생활 속에서 허난설헌은 별당에 자기를 가두고서는 시로써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다음 시는 아들을 잃고 지은 노래이다.


작년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애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서로 마주하고 있네.
쓸쓸한 백양나무 바람에 귀신의 불이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밝히네.
종이 돈으로 너의 넋을 부르고, 검은 술로 너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네.
남매의 혼이 밤마다 서로 찾아다니며 노닐 것을 알겠네.
설령 뱃속에 아이가 있다 해도 어찌 그 아이가 무사히 자라기를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며 피눈물로 슬픔에 소리를 삼키네.
허난설헌 '곡자'


이 시에서 알 수 있듯,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다 잃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훌륭한 아들을 두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신사임당과 같은 훌륭한 아들을 남기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역적으로 몰린 동생 허균뿐이었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집필할 정도로 개혁적인 사상을 가졌으나, 결국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역설적으로 그녀의 시는 중국에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허균이 그녀의 시를 중국에 소개하자, 명나라 문인들은 그녀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녀의 시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이 중국에서 출판되었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신비로운 천재 시인'으로 칭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리고 조선 사회에서 승자는 가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훌륭한 자녀를 키워낸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허난설헌은 중국에서도 인정받은 천재 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사임당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조선에서 한 여성의 업적은 여성 개인의 역량이 아닌 그가 남긴 자식을 통해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난설헌은 아래의 시처럼 스물 일곱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아들을 남기지 못한 또 한 마리의 호랑이는 잠시 얼굴을 내밀고는 또다시 동굴에서 쫓겨났다.



어머니는 자식의 성공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고방식은 과거의 일로만 남았을까?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성 개인의 성취보다는 ‘훌륭한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원가에서는 아들을 명문대에 보낸 어머니가 존경받고, 교육 컨설팅 업계에서 성공한 자녀를 키운 이들이 전문가로 불린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여성의 능력은 여전히 그녀가 길러낸 자녀의 성공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근 강남 대치동 엄마들의 모습을 풍자한 개그우먼 이수지씨의 영상이 화제라고 한다. 일명 ‘도치맘’으로 고슴도치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이런 패러디 영상에 등장하는 대치동 엄마들의 모습을 보면, 한민족의 원형이나 집단 무의식은 갑자기 사라지는 건 절대 아닌 것 같다.

절대로 폄하하려고 한 말이 아니다. 공부 잘하고 출세하는 아들을 키워내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화나 문학 속에서는 여성 자신의 삶보다는 현모양처로서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내는 삶이 가치있다는, '집단무의식'이 여전하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집단무의식은 여전히 강력하게 우리 사회에 지배적인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녀 간의 갈등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2018년에 발간되었다. 과거 여성의 삶이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한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뜻하지 않은 논란에 휩싸인다. 소설의 말미에 ‘김고연주’(여성학자)라는 평론가가 작성한 작품해설이 이 논란을 잘 보여준다.


엄마가 되면서 개인적 관계들이 끊어지고 사회로부터 배제돼 가정에 유폐된다. 게다가 아이를 위한 것들만 허락된다. 아이을 위해 시간 · 감정 · 에너지 · 돈을 써야 하고, 아이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 엄마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면 엄마의 자격을 의심받는다.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아이를,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은 여성의 의무가 아니라 사회의 의무인데, 개별 가정에서 대부분 엄마가 ‘독박 육아’를 하고 있는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 출산 후 독박육아 몇 개월 만에 겨우 집을 나와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맘충’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작품해설


이 소설은 아이들을 힘들게 키우는 많은 엄마나 여성들의 공감을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반대로 수많은 남성들의 공격을 받았다. 남자들이 당하는 역차별에 대해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과거는 과거일 뿐 왜 과거의 아버지 세대들이 겪은 부조리한 일을 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넘쳤다. 여자들만 힘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들도 힘들다는 것이다. 같은 남자로서 충분히 공감이 된다.

사실 학교에 있다 보면 요즘 남학생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역차별을 당한다는 분노가 많다. 자기들은 군대에 가서 힘들게 고생하는데, 그 사이 여자들은 철저히 시험 준비를 하여 좋은 직업을 다 차지한다는 것이다. 아주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억울할 만하다. 한편으로는 군 가산점 제도도 위헌으로 판정이 나는 바람에 국방부도 난감했을 것이다.

당연히, 남자라는 이유로, 남자들만이 져야 하는 무거운 짐이나 역차별이 있었다면 이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해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 없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집단무의식'에 기대 혐오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반면, 여성들의 논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과거 남성들이 독점적으로 누리던 권력을 이제 여성들이 함께 누리게 되었을 뿐인데, 이를 두고 ‘남성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시각이 있다. 여성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으며, 단순히 몇몇 직업군에서 여성 비율이 높아졌다고 해서 남성들이 불이익을 받는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여전히 성범죄, 가정폭력, 직장 내 차별 등 다양한 형태의 젠더 기반 불평등을 겪고 있으며, 이에 대한 구조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남성들이 군 복무를 이유로 자신들이 더 큰 희생을 치른다고 하지만,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떠안고 있으며, 여전히 임금 격차와 승진 차별 등의 현실적 문제를 겪고 있다고 반박한다.

여성들은 사회에서 평등한 기회를 얻고자 하지만, 일부 남성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군 가산점 제도 폐지를 두고 남성들이 불만을 제기하지만, 정작 여성들이 군대를 가야 한다는 주장에는 반발하는 등, 남성들이 선택적으로 피해자를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있나?

단군신화로 부터 여기까지 왔다. 신화에 담긴 집단의 무의식이 참 질기고 질기다는 생각을 한다. 달라진 건, 이젠 곰이든 호랑이든 할 말은 다 하고 산다. 특히 호랑이는 더 이상 도망도 가지 않고 숨지도 않는다. 불공정한 게임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한다. 환웅도 그의 아들 단군들도 이제는 호랑이 같은 여성들이 옛날같지 않다고 느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런 치열한 논쟁도 결국 본질은 ‘밥그릇 싸움’이다. 남녀 모두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사회에서 자신이 더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비판하는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기회를 빼앗는다고 느낀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고 반발한다. 그렇다면 이 남녀 갈등이 해결될 날은 올까?


먼저는 잘못된 집단무의식을 만드는 것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필요하다. '서동요'나 '춘향전'을 읽으며 남자들도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 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만 읽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또한, 건전한 집단무의식을 만드는 문화들이 자주 등장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배부른 소리 한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이후 페미니즘 논쟁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감이다. 요즘 같은 시대는 남자나 여자나 힘들기는 다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마음이 있으면 좋겠다. 논리적인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들어주는 게 훨씬 더 상대방의 마음을 녹인다.


의외로, 남녀 갈등은 사회 구조의 변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해소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저출산 문제를 겪고 있다. 2023년에는 출생 인구가 23만 명이다. 이렇게 되면 젊은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오히려 성별 간 경쟁보다 노동력 확보 자체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일자리가 줄어들어 경쟁은 더 심해질 거라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다. 인공지능이 수많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심지어 '특이점'이 와서 인간을 무용지물로 전락시킬 수 있다고 염려한다. 하지만, 사실 이건 클릭수를 늘리기 위한 과장이 더 많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아직 동물 수준의 감정도 갖지 못했다. 하물며 인공지능이 인간만이 갖는 '메타인지'를 갖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삽질을 하던 시대에 포크레인을 보고 인간이 곧 기계에 대치될 거라고 염려하던 시대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지식정보 처리역량을 보면서 곧 인간이 기계에 대치될 거라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힘만 쎄다고 기계가 우월한 것은 아니다. 지식정보 처리 속도가 빠르다고 기계가 우월한 게 아니다. 인간은 인간만이 갖는 메타인지와 영혼을 갖고 있다.


그런 힘으로, 이런 문제도 잘 해결해 갈 것이다. 이런 문제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시대, 곧 10년 이내로 지금보다는 많이 수그러 들 것이다. 물론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원형과 집단무의식은 오랫동안 더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러한 집단 무의식도 변화가 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남자와 여자는 원래 사랑하며 살게 되어 있다.


학교에서 보면, 남녀 갈등에 분노하는 학생일수록 더 이성에 관심도 많다. 남학생만 다니는 우리 학교에서는 저 멀리 여학생이 지나가는 것만 보아도 난리가 난다. 웃기는 놈들이다. 누군가 이런 남녀 사이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여 정치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했음도 반성할 일이다.


한편, 남녀 갈등이 시대적 변화 속에서 희미해질 수는 있지만, 오히려 그 자리를 세대 갈등이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한국은 빠른 속도로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젊은 세대 한 명이 부양해야 하는 노인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고, 젊은이는 급격히 감소하면서 젊은 세대의 부담이 점점 커질 것이다. 결국 제한된 자원과 부를 놓고 이제는 남녀가 갈등하는 게 아니라 세대 간에 갈등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정치권에서는 또 이러한 갈등을 조장하여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좋은 정치 지도자를 선출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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