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문학 4 『엄마를 부탁해』와 『심청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시골집에서 홀로 사시는 엄마를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의 실종을 다룬 소설이지만, 나의 엄마도 실종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엄마는 다섯 남매를 다 키워 내보내시고,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서 시골에서 홀로 사셨다. 나는 솔직히 엄마를 시골에 홀로 두고 잊고 살 때가 너무 많았다. 그러니 실제 실종상태와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소설을 읽는 동안은 눈물이 많이 났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었다. 그 뒤로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말이다.
나의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면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코로나 시기에 요양병원에 갇혀서 자식들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쓸쓸한 겨울 아침에 혼자 돌아가셨다.
엄마는 코로나 기간 내내 요양병원에 있었다. 엄마는 결국 나오지 못했다.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다 보면, 사관(史官)이 성에 고립된 인조를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고 한 줄로 묘사한다. 그 말이 엄마의 상황을 말하는 데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치매로 인해 엄마는 하루 종일 신경안정제를 먹고 비몽사몽 잠이 들어 계셨다. 면회를 가는 날에도, 겨우 눈을 뜨고 유리 너머로 희미한 웃음만 비치셨다. 가끔 들어오라고 손짓도 하셨고, 어떤 날은 손에 먹을 것을 쥐고 나에게 건네는 시늉을 하셨다. 눈에는 눈물인지 무엇인지가 맺혀 항상 눈꼽이 있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자식들을 전혀 귀찮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엄마는 코로나 전에 나를 많이 귀찮게 했었다. 20년 넘게 시골에서 혼자 지내시면서 외로움의 끝에 치매가 왔고, 엄마는 하루에도 스무 번 이상을 전화하셨다. 금방 전화하고 또 전화하고, 짜증내는 아들에게, 내가 전화 했었느냐고 반문하시면서 또 전화하셨다. 외로우셨던 거다. 그렇게 1년이 넘게 엄마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엄마를 진심으로 돌보지 못했다. 내 가정이 있다는 핑계와 직장일로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다. 사실 엄마를 잃어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기 전 낙상을 해서 고관절 수술을 했다. 입원한 날부터 보름 동안, 엄마는 옆에서 병 간호를 하는 아들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나는 잠을 못 자게 하는 엄마가 너무 미워서 나도 모르게 엄마 얼굴을 꼬집기도 했다. 오랜 병에 효자 없었다. 오랜 병은 고사하고 나는 며칠 밤 잠을 설쳤다는 이유로 엄마를 원망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보낸 시간이 엄마와 같은 공간에서 보낸 마지막 시간이었다.
엄마가 퇴원해서, 누나의 차을 타고 시골집으로 가던 날,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엄마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엄마는 그렇게 시골에 내려가서 며칠을 못 버티고 요양병원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다시는 나오지 못하셨다.
요즘 주변에서 내 나이 또래 되는 사람들이 아프신 부모님 때문에 이래 저래 힘든 모습을 본다. 치매는 물론 병명도 다양한다. 병도 문제지만 그 이상으로 드는 병원비는 물론, 병 간호 문제로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효는 당연한 인간의 윤리인가?
과거에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당연한 도덕적 의무로 여겨졌지만, 고령화 속에서 부양 부담이 가중되면서 효의 개념도 변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부모를 모시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고통이 되는 시대가 올 것 같다. 아니다. 이미 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이제 힘든 일이다. 특히 형제 자매가 많지 않은 자식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무엇이 진정한 효도인가? 다음 두 이야기를 비교해보자.
아이를 묻은 손순(孫順)은 우리나라의 효자다. 손순은 통일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때 사람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내와 함께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며 늙은 어머니를 정성스레 봉양했다. 부부에겐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끼니때마다 할머니의 음식을 빼앗아먹어 골치였다.
손순이 부인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소. 아이가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기 때문에 굶주림이 너무 심하오. 그러니 아이를 땅 속에 묻어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야겠소"
아이를 업고 동네 뒷산에 가서 땅을 파는 도중에 무엇이 걸려 파 보았더니 돌로 된 종이 나왔다. 아이의 복이라 여겨 묻지 않고, 석종을 지고 내려와 집 대들보에 매달고 쳐 보니 대궐에까지 소리가 퍼져 나갔다. 『삼국유사』 권5 효선편 (孝善篇) 손순매아
효종랑孝宗郞이 남산의 포석정鮑石亭에서 유遊할 때에 문객門客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왔다. 랑郞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나이가 스무 살 안팎의 여자가 눈먼 어머니를 껴안은 채 서로 소리내어 울고 있었으므로 그 마을 사람에게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하여 걸식으로 어머니를 봉양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으로도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몸값으로 곡식 30석石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하다가 날이 저물면 쌀을 가지고 집에 와서 밥을 지어먹고 함께 잠을 자고, 새벽이 되면 주인집에 가서 일을 하기를 며칠이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지난날의 거친 음식은 마음이 편했는데 요즘의 좋은 쌀밥은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하자 어머니가 통곡하므로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 하고 마음을 살피지 못하였음을 탄식하여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느라고 늦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三國遺事』권5, 효선孝善9, 빈녀양모 (貧女養母 )
손순매아와 빈녀양모, 일명 '효녀 지은' 설화는, 부모를 위해 극한의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두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부모를 봉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손순은 심지어 어머니를 위해 자식을 죽이려 하고, 효녀지은은 자신의 몸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효행은 당시 유교적 가치관에서 부모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헌신을 강조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효를 행한 결과로 많은 보상을 받는다는 결말 구조를 가지고 있다. 손순은 아이를 묻으려다 우연히 석종을 발견하여 큰 부를 얻게 되고, 효녀지은은 직접적인 보상을 받지는 않지만 후대에 칭송받으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이는 효를 실천하면 반드시 보답이 따른다는 유교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두 이야기는 효를 실천하는 방식과 강조하는 가치에서 차이를 보인다. 손순매아 설화에서 손순은 부모가 자식보다 우선한다는 사고방식을 따른다. 그는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다"는 논리로 자식을 희생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는 부모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당시의 유교적 가치관을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사례이다.
반면, 효녀지은 설화에서는 효의 개념이 물질적 봉양을 넘어 정서적인 보살핌으로 확장된다. 효녀는 단순히 어머니를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가 마음으로 편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버지를 부탁해' 심청이는 효녀인가?
효녀 지은 설화는 이후 조선시대 고소설인 심청전의 근원설화가 된다. 그런데 심청전을 보면, 효녀지은의 주제보다는 왠지 손순매아의 주제와 연결되는 듯한 생각이 든다. 과연 자기 몸을 바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들, 나중에 아버지가 이를 알았을 때에 고마워했을까?
그렇다면 심청이는 진정한 효녀일까? 과연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행위를 무조건 칭찬해야 할까? 물론 심봉사에게 있어 눈을 뜨는 것은 평생의 소원이었겠지만, 정작 딸의 목숨을 담보로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그는 과연 기뻐할 수 있었을까? 심청이가 아버지를 위해 스스로 희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효심은 갸륵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진짜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혹시 심청이는 아버지 봉양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불경한 상상이지만, 아버지와 함께 사는 현실이 너무도 힘겹고 답답하여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것이 오히려 탈출구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아버지의 눈은 부처님에게 맡기고, 아버지의 몸은 뺑덕어미에게 맡긴 채로 심청이는 아버지를 떠난 것이다.
황당한 가설일까? 그러나 이를 단순히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심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어머니를 몇 푼 돈에 요양병원에 맡기고, 코로나를 핑계로 어머니에게서 도망쳤기에 하는 소리다. 물론 나는 여전히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다고 생각한다.
고령화 사회
우리나라는 이미 심각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였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4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전체 인구의 19.2%에 달하며, 이는 약 993만 8천 명에 해당한다. 특히 70대 이상 인구가 20대 인구를 넘어선 상황이며,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초고령사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한 인구 구조의 변화는 전통적인 효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장수 사회가 되면서 부모의 노년기가 길어지고 있어, 한 두 사람의 자녀가 오랜 기간 경제적·정서적으로 두 명의 노인 부모를 돌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더 이상 개인의 희생과 헌신만으로 부모 부양을 감당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결국, 나이들어 가는 노인들은 다음 세대에게 물질적 효도를 기대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심청이처럼 눈먼 아버지를 떠나는 자식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현대판 고려장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우리나라는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률이 세계 최고이다. 젊어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왜 이렇게 힘들고 외롭게 살아야 하는지 비통한 분들이 많다는 말이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자식을 위해 평생 헌신하고는 정작 자신은 자식들에게 돌봄을 받지 못하는 세대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억울할 법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 세대를 위하여 많은 돈을 복지비로 쓰는 걸 젊은 세대들이 좋아할 리는 없다. 단언컨대 젊은 세대는 노인들을 위한 과도한 복지비를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삶도 버거운 상황에서 아버지를 모시기도 벅찬 세대는, 자신들의 세금을 들여 노인들에게 돈 쓰는 것을 반대할 것이다. 잔인하지만 비정한 소리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손순은 부모님을 위해 자기자식을 묻으려 했지만, 이미 젊은 세대들은 삶 자체가 버거워 이미 자식들을 묻었다. 출산율이 말해주고 있다. 하물며 부모 세대를 위해 자식을 하나 더 묻으라고 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앞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인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인 복지나 의료비 등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인들을 위한 복지비를 늘려도 재원은 한정될 것이고, 계속 증가하는 노인들끼리도 돈을 두고 치열한 경쟁과 싸움이 있을 것이다.
결국 노인들과 노인들의 갈등은 물론, 노인들은 젊은 세대의 불편한 시선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전통적인 개념의 효도는 일찍부터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나도 늙을 날이 멀지 않았기에 하는 소리다.
'오징어 게임'이 될 노후 대비 다들 철저히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