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문학 6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
육사와 동주, 이들에게는 삶이 곧 시였다.
육사와 동주는 일제 강점기라는 가혹한 현실에서,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성찰했다. 그리고 시를 남기고 그로 인하여 이름을 남겼다. 그들이 남긴 시와 이름은 그만큼 처절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서시’에서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육사 ‘절정’에서
동주와 육사는 모두 힘든 시기에 자신들만 편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들도 힘들게 살려고 했다. 양심의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너무 편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부끄러워 했다. 그만큼 일제 강점기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대였다.
동주는 간도에서 태어나 서울로,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엘리트였다. 그렇기에 일제강점기라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이 너무 나태한 것은 아닌지 성찰했다. 그리고 고민의 결과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깨달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부끄러'움과 '사랑'의 마음으로 시를 썼다. 일제는 동주의 그러한 마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사상검열이라는 수단으로 불량선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감옥에 넣었다. 감옥에 넣고는 심지어 생체실험을 했다는 의혹도 있다. 동주는 해방을 몇 달 앞두고 감옥에서 죽는다.
한때 윤동주가 좋아서 그의 시를 많이 외웠다. 특히 ‘별 헤는 밤’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내 고향은 충남 청양이다. 내가 시골에 살던 때도 시골 청양의 밤하늘에는 온통 별천지였다. 나도 별 하나에 이런 저런 이름을 붙이고 놀았던 것 같다. 그래서 국문학을 했고 대학에 처음 들어가서 쓴 논문은 윤동주의 삶과 시에 대한 것이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윤동주 '별 헤는 밤'에서
이육사도 마찬가지다. ‘매운 계절’은 일제 강점기를 상징한다. 그는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극한의 상황에 몰려서 눈감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고백한다.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겨울’로 비유된 일제 강점기는 ‘강철’처럼 단단해 보여도 본질적으로는 ‘무지개’라는 것이다. ‘무지개’의 상징적 의미를 알면 쉽다. 무지개는 곧 사라지며 해가 뜰 것을 알려준다. 우리의 삶에도 비가 그치고 곧 해가 뜨기를 바란다.
이육사(264)는 그의 수인 번호이다. 그는 첫번째 감옥 살이에서 얻은 수인 번호를 그의 호로 삼았다. 이는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규정한 선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사십 평생 열 일곱 번 감옥에 갇혔다.
그동안 이육사는 수많은 회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변절의 유혹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그렇지만 그 때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생각하며 하루 하루 순간을 버텼다. 그가 정말 처음부터 칼로 찔러도 피 한방을 한 나는 강인한 사람이 아니라, 매일 울면서 버틴 것이다.
그리고 육사도 감옥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동주와 육사의 이름은 지금 역사에 남아 감동으로 전해진다.
하늘 및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이육사 '청포도'에서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일제강점기 시인 중에서 육사와 동주 외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백석이다. 그의 시는 마치 한 편의 이야기 같다. 기교가 없는 듯 옆 사람에게 담담하게 풀어 놓는 이야기 같다. 물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모던 보이로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한 여자만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지 못한 '바람둥이' 논쟁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시 「국수」나 「여우난 곬족」를 읽으면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하여 감상에 젖게 만든다. 마침 내가 살았던 동네 이름도 '여우재(여주재)'였다. 그 고개 아래에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뛰어놀다 보면, 엄마가 밥 먹으라고 소리쳐 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밤에 화로불에 앉아 밤도 구워 먹고, 때로는 동치미 꺼내 놓고 고구마니 감자 등을 먹었다.
백석의 시를 읽으면 이렇게 시골 음식의 향과 맛이 난다. '나타샤'의 이국적인 향수 냄새는 슴슴한 국수와 무이징게국 냄새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에서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랫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윗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 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대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 '여우난곬족'에서
백석은 해방 전후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한 백석의 마음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잘 드러난다.
이 시의 제목은 발신인의 주소이다. 백석이 머물렀던 방이,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백석은 자신의 심정을 시에 부쳤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지식인의 고뇌와 인내, 그리고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힘겨운 사투가 담겨 있다. 아내도 잃고, 집도 잃고, 온 가족과 떨어져 죽음을 생각하던 순간, 그는 서서히 고개를 든다.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신보다 더 크고 높은 힘이 자신을 어디론가 이끌어 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에서
그는 절망 속에서 슬픔과 한탄이 서서히 가라앉고, 마침내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순간,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 그 드물다는 갈매나무를 떠올린다. 갈매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꺾이지 않고 서 있는 나무다. 바람을 맞고, 눈을 맞고, 그 모든 것을 견디며 서 있는 나무. 그것은 결국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하는 존재가 된다.
백석의 시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가만히 말을 걸어온다. 삶이 때로는 절망스럽고, 외롭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더라도, 갈매나무처럼 버텨야 한다고. 문학은 비록 "다시 어디로 가는지"까지는 말해 주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포기하지 않고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준다. 이처럼 문학은 힘이 세다.
그는 해방 후에도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였고 그곳에 어머니기 계시기에 그리했을 것이다. 어쨋든 그는 월북시인으로 분류되었다. 북한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지만,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숙청되어 평생 농부로 살았다.
남한에서는 1988년에 비로소 해금 조치가 이루어졌다. 해방 전부터, 윤동주도 그의 시집을 얻으려고 노력했던, 원체 유명했던 시인이었기에 백석의 시는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의 시는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 시험에도 출제되었다.
그런데 이 수능 문제는 복수정답 논란이 일었다. 그 유명한 2004년 수능국어 17번 문제다. 백석의 「고향」에 나오는 '의원'이 '미궁의 문'인가 '실'인가 논쟁이 되었다. 결국은 둘 다 정답으로 처리되었다. 묘하다. 그의 삶도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인정받지 못하다가 결국은 둘 다 인정받았다.
백석의 삶은 무엇 하나로 옳다 그르다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논란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란만장한 백석은 결국 살아남아 '갈매나무'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의 삶에 대한 비난과 금기 속에서도 결국은 다시 살아 남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시골집 구수한 향기를 전하는 친숙하고 정겨운, 시골집 농부 아저씨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