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문학 7 『봉산탈춤』
조선의 개콘 '봉산탈춤'
소설과 시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극예술 쟝르로 분류되는 작품도 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국어 시간에 한 번쯤 배웠을 『봉산탈춤』이다. 나는 봉산탈춤을 가르칠 때마다 '개그콘서트'를 떠올린다.
『봉산탈춤』은 마당극으로, 단오와 같은 명절에 마당에 무대를 펼치고 신나게 한바탕 즐기는 공연이었다. 이 연극은 총 7과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7개의 코너를 통해 당시의 현실을 풍자하면서 한바탕 왁자지껄 놀았다. 그리고 잠시나마 사람들은 이 놀이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잊으며 카니발적인 일탈을 즐겼다.
특히 6과장의 양반춤에서는 양반들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노래가 주를 이루는데,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조롱이 가능했을까?
『봉산탈춤』에 나오는 양반들은 무식하기 그지없다. 시조 한 줄 제대로 짓지 못하고, 파자놀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에는 환장하도록 집착한다. 외모는 언청이거나 입이 비뚤어진 존재로,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걸 서슴지 않고 표현한다. 이렇게 양반들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방식으로는 극단적인 희화화와 언어유희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그렇다면 양반들은 왜 이런 극단적인 풍자와 조롱를 묵인했을까?
욕바위와 '개그콘서트'
옛날에는 ‘욕바위’라는 것이 있었다. 송사(訟事)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바위 위에 올라가, 당사자인 양반이나 사또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아무리 심한 욕을 해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백성들은 정식으로 억울함을 풀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욕바위는 일종의 사회적 안전장치 역할을 했다. 쌓인 분노를 해소하고, 잠시나마 속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양반들도 이를 묵인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양반들은 소작농이나 노비들의 불만을 이렇게라도 해소시켜 주는 것이 결국 자신들에게도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그냥 모른 척 했던 것이다.
요즘은 '욕바위' 가 사라지고 익명성을 바탕으로 한 댓글이 넘친다. 심지어 근거 없는 악플은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악플의 폐해가 많아도 포털사이트에서는 절대로 인터넷 댓글을 없애지 않을 것이다. 댓글을 없애는 순간 접속자는 반에 반으로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옛날에 마당에서 한바탕 놀았던 『봉산탈춤』은 이제 특별한 장소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문화재가 되었지만, 『봉산탈춤』의 정신은 이제 '개그콘서트'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개그 프로그램에는 단순한 웃음을 전달하는 것도 있었지만, 사회 지도층과 재벌을 향한 풍자와 해학이 유난히 많았음을 기억할 것이다.
최근에는 SNL과 같은 프로그램이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최근 금기시되는 남녀간의 성적인 농담까지 서슴지 않고 풀어낸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사회 지도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는 물론 우리들의 위선도 거침없이 폭로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풍자와 해학이 허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충은 다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나마 잠시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단이라도 없다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개콘이라도 보고, 스포츠와 드라마, 영화라도 보면서 울분을 달래고 현실을 비판하고 한바탕 욕하고 웃지 않으면, 우리 같은 서민들이 도대체 어디서 이 서러움을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미하일 바흐친 '카니발 이론'
위와 같은 내용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이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카니발 이론(carnival theory)이다.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아 '카니발 이론'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중세 카니발은 교회와 국가 권위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자유롭게 웃고, 놀고, 사회 질서를 뒤집는 축제였다. 이때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왕과 농부가 같은 위치에서 서로 조롱하며, 평소 억눌렸던 감정과 욕망이 표출된다.
바흐친은 이러한 카니발을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사회 비판과 해방의 상징으로 보았던 것이다. 공식 문화(권위적, 경직된 말)에 대한 비공식 문화(웃음, 풍자, 대화)의 반란과 도전이자, ‘신성한 것’을 세속화하고, 권위의 언어를 희화화함으로써 새로운 의미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문학에서도 이러한 카니발과 같은 해방적 요소가 나타나는데, 이후 이 개념은 ‘카니발레스크(carnivalesque)’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학에 나타나는 카니발레스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위계의 전복 : 왕이 농부보다 못하게 그려지거나, 성직자가 어리석은 존재로 등장함.
신체성 강조 : 특히 배설, 식사, 성, 출산 같은 신체적 행위가 부각됨. → 신체의 ‘하반신’ 강조.
풍자와 패러디 : 권위 있는 인물, 제도, 담론을 웃음으로 무너뜨림.
집단적 경험 : 개인이 아닌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고, 감정과 욕망이 해방됨.
위와 같은 카니발레스크의 특징은 그대로 『봉산탈춤』의 특징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탈춤 안에서는 평민이나 하인들이 양반들의 권위를 전복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그려낸다. 성적인 농담이나 욕설도 거침이 없다. 당연히 당대에 가장 권위있는 대상을 풍자하고 조롱한다.
이러한 '카니발 이론'과 '카니발레스크'에 대해 바흐친은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놀이문화를 통한 가치의 전도는 기존의 질서를 잠시 해체하고 무력화시키지만, 서민들의 건강한 삶을 회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화는 지배층에 대한 경고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카니발레스크는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회사에서 야유회를 가서 '야자타임'을 했다고 해서 그게 장기적으로 회사 안의 평등문화로 정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면에서 보면, 현대 사회에서 문학에 등장하는 '카니발레스크'가 진정으로 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와 저항정신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이 되기도 한다. 지배층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관용과 후덕함을 빛내고 싶어 '카니발 축제'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이런 일탈의 놀이를 당시 지배층들이 후원하고 일부러 묵인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욕바위'나 '봉산탈춤', 그리고 '개그콘서트'나 '카니발 축제'가 서민들 스스로 만들어 낸 자발적인 문화였는지 아니면 지배층들의, 고도로 발달한 통치 행위인지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란에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공산당의 창시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는 서민들의 카니발적인 문화를 지배층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튼튼히 만들기 위한 고도의 수법으로 이해하였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의 착취를 통해 계급 질서를 견고히 한다고 설명한 반면, 그람시는 기득권층이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중을 지배하는 방식이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이를 ‘헤게모니(hegemony) 이론’ 이라고 한다.
헤게모니란 단순한 물리적 강압이 아니라, 기득권층이 교육, 종교, 언론, 문학과 예술을 통해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피지배 계급(대중)이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오히려 기득권층의 논리를 수용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동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기득권층이 이를 유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헤게모니를 형성한다고 설명했다. 학교에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주입하지만, 실제로는 계급적 한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대중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며, 사회 구조의 불평등보다는 개인의 노력 부족을 탓하게 된다.
뉴스,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특정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이 성공하는 이야기를 강조하면, 사람들은 사회 구조의 문제보다는 ‘노력하면 된다’는 믿음 속에서 체제에 순응하게 된다.
또한, 완벽한 통제보다는 일정 수준의 사회 비판을 허용해, 대중이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느끼도록 한다. 개그 프로그램, 풍자 문학 등이 존재하지만, 근본적인 체제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중은 ‘우리는 비판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체제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 중에는 아예 대놓고 국민을 세뇌하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한다. 이는 현대의 ‘3S 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과도 연결된다. 기득권층이 대중이 정치적 각성과 사회 변혁보다는 오락과 쾌락에 몰두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이론'을 통해 기득권층의 이러한 위선적인 정책을 이해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기득권과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고 차별과 종속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고 우려한 것이다. 김광규의 '상행'은 이런 그람시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김광규 '상행'에서
문학은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올바르게 풍자하고,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을 지닌다. 가진 자들의 위선과 거짓을 꾸짖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에는 또 다른 기능도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당대의 서민들은 『봉산탈춤』을 보며 양반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 개혁을 위한 저항 의지를 다짐 했을까? 아니면 ‘저 놈들 참 가소롭군’ 하며 속으로 욕하고, 껄껄 웃은 뒤 다시 철저한 복종의 일상으로 돌아갔을까?
이문열의 『시인과 도둑』
이문열의 중단편 소설에 『시인과 도둑』이 있다. 92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시인이 구월산 도둑을 만나 경험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나오는 도둑은 단순히 남의 물건을 빼앗는 도적이 아니다. 그들은 이른바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며 개혁을 추구하는 의적들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의적이라 불리는 이들의 용기를 북돋아 준다. 또한 이 시는 지배층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기도 했다. 지배층에게는 두려움을 주어 좌절하게 하고, 의적들에게는 용기를 주어 힘차게 싸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온다. 오히려 지배층은 그 두려움으로 도적을 더 철저하게 방비하는 등 자기 반성을 철저히 한다. 하지만 의적이라 불리던 이들은 무모한 용기만을 가지고 덤볐다가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다. 용기만 앞섰지 정작 철저한 실용적 준비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이문열의 창작 의도는 매우 분명하다. 그는 보수적인 문인이다. 문학이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비판한 것으로 이해한다. 솔직히 이문열의 생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또한 틀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
문학은 창작을 한 사람보다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어떠한 태도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카니발 이론'이든 '헤게모니 이론'이든 문학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문학은 매우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현명한 지배층이나 리더라면 이러한 문학을 통해 자기를 성찰하며 지배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방향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을 통해 민심을 읽고 국민들이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거센 공산주의의 도전 앞에서 현재까지 지배적인 체재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자기 반성과 변화에 있었다.
현명한 민주적인 시민이라면, 문학을 통해 단순히 순응적인 태도만을 갖지 말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힘이 없고 나약하다. 그러나 연대한 시민은 힘이 있다. 문학은 시민의 연대의식을 만드는 탁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풀은 바람이 불면 누구보다 먼저 눕는다. 하지만 연대한 시민들은 누구보다 더 빨리 일어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