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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남한산성』에 들다

인문학의 도구 : 역사 5 김훈의 『남한산성』

by 양심냉장고

김훈의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을지문덕과 같이 '이겨 놓고 싸운다'는 전략의 대가로는 이순신을 빼놓을 수 없다. 이순신은 너무 위대한 인물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의 삶은 『징비록』이나 『난중일기』를 통해서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나,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까지 잘 표현하여 영웅의 삶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상상력을 발휘한 소설이지만, 훨씬 더 인간 이순신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다.


영웅들은 아무 두려움이나 겁이 없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더 고뇌하며,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 묻고 또 물었던 사람들이다.


김훈은 『칼의 노래』는 물론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남한산성』도 썼다. 『칼의 노래』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통해 느끼는 통쾌함이 있는 반면, 『남한산성』은 오랫동안 내려가지 않는 답답함이 묵직하다. 그러나 이러한 답답함도 또한 우리의 역사이니, 깊이 돌아볼만한 가치가 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남한산성』 보면, 병자호란으로 산성에 갇힌 이들이 명분과 실리를 놓고 싸운다. 명분과 실리의 싸움은 당시 유학자의 관점으로 보면 중요한 가치이다. 특히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이들에게는 명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을 생각하는 대의의 측면에서 인조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분명하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분조(分朝)를 이끌며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경험했다. 그리고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런 뼈저린 경험으로 분명한 가치관을 만들었고 실천에 옮기도록 했다. 광해는 선조의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어떻게든 전쟁은 피하려고 했다. 유교적 명분에 치우친 신하들과 유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립외교를 펼친다.

인조와 서인은 광해가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후금과 중립외교를 펼치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다. 안으로는 어머니께 패륜이요, 밖으로는 아버지의 나라인 명나라에 패륜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조 정권은 철저한 ‘친명배금’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명과의 일전을 앞둔 후금(청)은 결국, 입안의 가시와 같은 조선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실리보다 명분을 택한 인조 정권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소용돌이에 내몰리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불과 35년 만이었다.

명분을 택했어도 최소한의 실리는 챙겨야 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소설 속, 인조 정권은 말만 앞섰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정묘년에 이미 조선은 후금군의 침입을 받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었다. 그때는 그나마 후금이 조선과 맹약을 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럼 10년 동안 철저한 준비를 했어야 한다. 실패를 교훈삼아 철저히 준비했어야 한다. 하지만 조선의 왕과 신하들은 강화도 행궁을 불타우는 배수진으로 일전을 각오하자는 목소리만 높았다.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농장기를 들고 일어서서 아비는 아들을 죽인 적을 베고, 아들은 누이를 간음한 적을 찢어서 마침내 사직을 회복하리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하지만 적들은 이미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그 말의 크기와 높이는 보이지 않았다.
김훈 『남한산성』


목소리만 높이고 실질적 준비는 하지도 않으면서, 죽기까지 싸우자는 목소리만 높였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는 전쟁의 위험만 더 키웠다. 결국 청은 혹독한 한겨울, 강이 얼어붙자마자 거칠 것 없이 밀고 내려왔다. 말만 앞섰지 아무 준비없이 허송세월로 보낸 인조정권은 강화도로 가지도 못한다. 피난도 제대로 못하고 말싸움만 하는 사이 후금군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어쩔 수 없이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었다.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에 궁녀들과 견마잡이들이 다 도망갔다. 임금은 나루터 사공의 안내로 강을 건너고 새벽에야 겨우 남한산성에 들었다.


그리고 임금은 그때부터 48일 동안을 남한산성에 있었다.


뱃사공이 죽는 날, 강은 '꽝꽝' 얼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갈 때 어가 행렬은 늙은 사공의 도움으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늙은 사공에서 좁쌀 한 줌 주지 않았다. 백성들이 임금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임금이 자기 살기에 바빠서 미천한 사공의 형편까지 보살필 처지가 되지 않았을까?

작은 대가라도 받아 생계를 유지하려던 사공은 결국 다시 청병을 기다렸다.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김상헌은 이런 사공의 마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백성이로구나' 탄식한 예조판서 김상헌은 눈물을 머금고 늙은 사공을 벤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백성들의 삶이다. 백성들이 뭐 큰 거 바라는 거 아니다. 물론 예조판서 김상헌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 주권의 관점에서 보면, 김상헌의 행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작가의 생각도 김상헌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 듯 하다. 그날 새벽에 강은 상류부터 먼 하류까지 '꽝꽝' 얼어붙었다고 서술하였다. 사공의 죽음은 전혀 필요하지 않은 억울한 죽음이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새벽에 눈이 내렸다. 눈이 쌓여서 사공의 시체가 언 강 위에서 하얀 봉분을 이루었다. 강 건너 사공의 마을에서 말이 밤새 울부짖었다. 그날 새벽에 강은 상류부터 먼 하류까지 꽝꽝 얼어붙었다.


임금이 이름모를 사공의 헌신을 헌신짝만큼도 여기지 않은 날, 임금의 행렬은 남한산성에 들고, 한밤에는 비가 내렸다. 하늘도 조선의 임금을 도와주지 않은 것이다. 성첩의 군사들은 모두 얼었다. 그날 어전의 대책회의에서는 왕실 종친들의 체통을 위해 의관을 걷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이야기 하고 있었다. 물론 임금도 비를 맞았다.


"우리 부자의 죄가 크다. 허나 군병들이 무슨 죄가 있어 젖고 어는가."
임금은 오래 울었고 깊이 젖었다. 마루 위에서, 서안 앞에 앉은 젊은 사관이 벼루에 먹을 갈며 마당에 쓰러져 우는 임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관이 붓을 들어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사관은 울지 않았다.


하지만 사관은 울지 않았다. 같이 울지 않은 사관은 과연 인조를 바라보면서 무어라고 썼을까?


주전(主戰)과 주화(主和)의 딜레마

이후, 남한산성 안에서는 지리한 싸움이 시작된다. 나갈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인가. 사람들은 나가고 싶지만, 나가자고 말을 하는 건 역적의 소리를 듣는 반역 행위이다. 명분과 실리의 싸움에서 초반에 실리를 추구하자는 목소리는 아무런 힘을 얻지 못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강상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안으로는 인목대비를 유폐하여 부모를 배신한 죄이고, 밖으로는 조선을 구해준 아버지의 나라 명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이고 절대 화친을 도모할 수 없는 불구대천지 원수였다. 그렇기에 후금과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 영의정 김류의 모습이 흥미롭다. 그가 남한산성 안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영의정 김류의 모습은 너무나 위선적이고 교활하게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성 안에 있던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이었기에 묘하게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영의정 김류는 전시의 체찰사를 겸하고 있었다. 싸우는 것과 웅크리고 버티는 것이 모두 영의정이며 체찰사인 김류의 일이었다. 김류는 싸움의 형식 속에 투항의 내용을 키워가는 듯싶었다. 수어사 이시백은 그렇게 느꼈다. 그 두 갈래 길이 부딪히면서 김류의 군령은 모질고 사나웠다.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마음에 떠올랐다. 버치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김류는 그래서 싸움과 버팀의 형식 속에서 어떻게든 성 안의 힘을 빼기 위해 노력한다. 다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면 안된다. 이렇게 보면, 김류는 과연 나라의 역적인가? 아니면 인조의 충신인가?


그렇게, 남한산성 안에서는 김류의 생각대로 성 안의 힘이 급격하게 빠지기 시작한다. 닭울음 소리가 사리지고 개와 소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집이 헐리고 결국은 싸움에 필요한 말을 잡아 먹기에 이른다. 노비들까지 싸움터에 내몰리고, 노비는 그 대가로 면천을 요구하다가 상전에게 매를 맞았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소진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최명길과 김상헌의 싸움이 시작된다. 성 안의 힘이 점점 빠지고, 드디어 현실적인 이익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최명길은 임금에게 주화의 필요성을 말하기 시작한다.

"예판이 화해할 수 있는 때와 화해할 수 없는 때를 말하고 또 성의 내실을 말하나, 아직 내실이 남아 있을 때가 화친의 때이옵니다. 성 안이 다 마르고 시들면 어느 적이 스스로 무너질 상대와 화친을 도모하겠나이까?"
"지금 묘당이라 해도 오활한 유자의 찌꺼기들이옵고 비국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헛된 말들은 소리가 크고 한 골로 쏘리는 법이옵니다. 중론을 묻지 마시고 오직 전하의 성단으로 결단하소서.


하지만, 주화의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최명길에 대한 탄핵과 죽음을 논하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말만 앞서는 자일수록 이러한 주장은 더 거칠고 강했다. 그런 주장을 할수록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가장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절대로 자기 손해나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인간상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들 중에서 비겁한 도망자도 나온다. 이런 상황을 수어사 이시백은 정확히 간파하고 최명길에게 말한다.


지금 싸우자고 준열한 언동을 일삼는 자들도 내심 대감을 믿고 있는 것 같았소. 충렬의 반열에 앉아서 역적이 성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겠소. 이 성은 대감을 집행할 힘이 아마도 없을 것이오.
수어사는 어느 쪽이오?
이시백이 대답했다.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
최명길의 목구멍 안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조선에 그대 같은 자가 백 명만 있었던들 ....


이시백의 말에 왜 최명길은 뜨거운 것이 올라왔을까? 이기심을 극대화하지 않고 그냥 자기의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으로도 최명길은 무척이나 고맙고 감사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명길과 김상헌과 종국에 가서는 서로 통할 수 있었다. 극단적인 주전과 주화의 싸움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사적인 이익과 욕심이 아닌 진정으로 나라와 종사의 안위를 염려하는 마음은 서로 통하는 법이다.


한편, 이러한 주전(主戰)과 주화(主和)라는 딜레마의 상황에서 독자들은 자신이 만약 인조와 같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다양한 인물들의 감정에 몰입하면서 동일시를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의 감정을 갖는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질문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조 임금이라면 ‘나는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국가를 위해 개인의 목숨은 하찮게 대해도 되는가?
역사의 흐름 앞에서 나약한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조선은 항복 이후에 청나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가?
청나라에 항복문서를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 정세에서 우리 지도자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게 바로 인문학에서 말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리더는 현명한 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 외에도 이 소설은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현명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좋은 인문학 독서 방법이다.


백성들도 남한산성에 있었다.

『남한산성』 안에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 외에도 백성들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여전히 이어지는 삶을 보여주는 서사도 한 축을 이룬다. 바로 서날쇠, 정명수, 뱃사공과 그의 딸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장장이 서날쇠는 가장 건강한 민중들의 삶을 보여준다. 후덕한 인심은 물론이고, 성실하고 야무진 사람이다. 탁월한 기술력으로 화약을 만들어 관아에 납부하기도 한다. 열심히 일해서 땅도 10마지기를 갖고 있으며, 일부는 소작을 주는 사업수완도 갖추고 있다. 그는 매사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임금이 남한산성에 들어온 날에 아내와 자식을 내보내고 어느 때보다 편한 잠을 잔다.


뒤뜰에 독을 파묻고서 서날쇠는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누웠다. 뜨거운 구들에 언 몸을 지져가며 모자란 새벽잠을 마저 잤다. 처자식이 떠난 집 안은 가벼워서 홀가분했고 한갓졌다. 서날쇠는 달게 잠들었다.


처절한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편하게 잠든 서날쇠의 모습에서 그동안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한 무게감을 읽을 수 있다. 서날쇠는 이후 남한산성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정에 성실했던 만큼 나라를 위해서도 자기의 주어진 재능을 발휘한다. 대장장이로서 병장기를 수리하고, 임금의 격서를 들고 성을 나서는 위험한 일을 감수한다.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나간 뒤에 서날쇠는 그 누구보다 먼저 내일을 준비한다. 뱃사공의 딸 '나루'를 누구와 혼인시킬지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소설은 서날쇠의 웃음으로 마무리 된다.


이런 서날쇠를 바라보며 김상헌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 ...... 라고 김상헌은 읽은 적이 있었다. 김상헌은 서날쇠에게서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있는 몸을 보는 듯 했다.


정명수는 은산 관아의 노비였다. 그의 부모도 노비였기에 그는 극천의 신분이었다. 극천인 노비로서 살아야 했던 정명수의 삶은 인간 이하의 삶이었다. 그는 조선의 백성이 아닌 그냥 사물이요 짐승취급을 받았다. 누이와 부모는 노비로 살다가 비참하게 얼어 죽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가 태어난 조선에 대해 아무런 애정도 없었다.

오히려 철저하게 짓밟고 무너뜨리고 싶은 증오의 나라였다. 철저히 용골대의 통역으로서, 그의 수하로서 조선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그러한 정명수를 누가 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명수를 나라를 저버린 매국노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백성을 지배층의 노비나 수탈의 대상으로만 부린 결과가 '정명수'와 같은 인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국가의 태도는 앞에서 언급한 '뱃사공'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임금은 안전하게 길을 건네준 뱃사공에게 아무런 대가도 주지 않았고, 예조판서 김상헌도 좁쌀대신 칼로 베었다.

만약 이 사실을 뱃사공의 딸이 알았다면, 그는 과연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 그의 아비가 죽었고, 김상헌이 침묵하였으니 뱃사공의 딸 '누리'는 평생 모르고 잘 살아갈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에서 무엇을 배웠나?

결국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 의식을 행한다. 이후 인조는 이날을 평생 잊지 못하고 북벌의 의지를 놓지 못한다. 하지만 북벌이 당시 상황에서 가당키나 한 소리였을까? 북벌은 소리만 여전히 소리(말)만 요란하고 실속은 없는 정치 이념으로 변질되었다.

남한산성에 갇혀서, 싸우자는 목소리를 높였던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달라진 것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복수심으로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청나라의 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마저 날렸다. 북학의 기회만 날린 것이 아니라, 조선 근대화의 싹이 될뻔한 아들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기까지 했다.


광해가 현군인지 폭군인지를 떠나서, 그는 세자로서 분조를 이끌며 임진왜란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전란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배웠다. 다시는 조선에 전쟁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중립외교를 고수했다.

하지만 인조는 48일 동안 남한산성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는 그곳에서의 처절한 고통에서 교훈을 배우기 보다는 원한만 쌓고 나왔다. 인조의 잘못은 이것이 더 크다. 누구나 실수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실수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 것은 문제다.


두 소설은 모두 팩션(faction)이다. fact(사실)'를 기반으로 하는 'fiction(허구)으로, 문학과 역사가 결합된 이 같은 형식이 인문학의 주제를 탐구하는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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