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역사 4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 동기
중국에 사마천의 『사기』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다.
이 두 역사서의 집필 동기와 함께, 책 속에 실린 인물 하나를 살펴보면서, 인문학으로서 역사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삼국사기』는 김부식에 의해 인종23 (1145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고려는 외척인 이자겸의 난과 서경 세력을 중심으로 묘청의 난이 연이어 일어난 직후였다. 인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을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있었다. 이에 인종은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김부식에게 『삼국사기』 편찬을 명하였다. 유교에 입각한 충효사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고려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편찬을 마친 후 인종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다.
“요즈음의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중에 『오경(五經)』, 『제자(諸子)』와 같은 책이나 진(秦)ㆍ한(漢)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달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자가 간혹 있으나,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재주와 학문과 식견을 갖춘 인재를 얻어 일가(一家)의 역사를 이루어서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해와 별처럼 빛나게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진삼국사표' 『동문선』 44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해 사대주의적인 인식이 강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위 내용을 보면 김부식은 중국의 역사가 아닌, 우리 삼국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당시 고려에 닥친 국난을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통찰하고자 한 것이다.
반면, 『삼국유사』는 1281년 충렬왕 7년에 일연이 저술하였다. 충렬왕은 원제국의 부마로서 왕의 이름 자체에 '원에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었다. 당시 고려는 원의 지배 아래에서 몽골의 언어와 풍속이 널리 퍼지는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 일연은 민족사상과 함께 불교 사상을 중심으로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일연은 승려였지만, 불교 사상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민족의 기이한 신화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대체로 옛 성인들은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는 부명(符命)을 받고 도록(圖籙)을 얻어 반드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런 뒤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서 제왕의 지위를 얻고 대업을 이루었다. 그런 까닭으로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옴으로써 성인이 나왔으며,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에워싸서 복희(伏羲氏)가 탄생하였고, (중략)
요(堯)는 잉태한 지 14개월 만에 태어났으며, 패왕은 용과 큰 못에서 교접하여 태어났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너무 많으니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들이 모두 신기한 일로 탄생했음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이것이 책 첫머리에 기이편(紀異篇)이 실린 까닭이며, 그 의도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기이(紀異)
이렇게 일연이 기록한 이야기들은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보물과 같은 자료가 되었다. 특히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는 신라의 사상과 문학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을지문덕
김부식이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살펴볼만한 인물들이 많다. 김유신을 시작으로, 을지문덕, 장보고, 박제상, 온달, 최치원, 관창, 그리고 궁예와 견훤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인물들의 이야기가 『삼국사기』에서 펼쳐진다.
김부식은 경주 김씨로 신라의 왕족 가문 출신이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삼국사기』에는 다분히 신라중심의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신라왕실에 충성을 다한 김유신 같은 인물을 가장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신라의 영웅 외에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고구려의 영웅 '을지문덕'을 알아보자.
612년, 수양제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요동성에서 고전하자, 별동대 30만 5천 명을 선발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바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모두 을지문덕의 유인 작전이었다. 수군(隋軍)은 극도의 피로와 군량 부족으로 인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을지문덕은 그들을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서 기습하여 궤멸시켰다.
이 모든 것은 을지문덕의 철저한 기만 작전이었다. 그는 일부러 싸울 때마다 후퇴하며 수나라 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고구려군은 전투에서 계속해서 물러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수나라 군대는 끈질긴 추격전을 펼치다가 점점 피로가 누적되었다. 반면, 평양성은 험준하고 견고하여 수군이 쉽게 공략할 수 없었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심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거짓 항복을 시도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수나라 장수 우문술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군대를 물리신다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 임시 왕궁)에서 직접 알현하겠습니다."
이는 단순한 항복 요청이 아니라, 수나라군이 퇴각할 명분을 제공하면서도 적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있다. 이후, 을지문덕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심리전까지 활용하며 우중문에게 시를 보낸다.
神策究天文 (귀신 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 (신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戰勝功旣高 (싸움에서 이겨 그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만족할 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을지문덕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이 시는 단순한 예의적인 표현이 아니라, 을지문덕이 적군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판단한 후 보내는 조롱의 시였다. 이 시는 겉으로는 우중문의 공을 칭송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미 승부가 결정되었으니 네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라"는 조롱과 기만이 담긴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는 또한 전쟁 전에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을 철저히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전쟁의 명분 아래 천문과 지리, 그리고 장졸을 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를 다시 찬찬히 뜯어 보면 을지문덕이 실제 병법의 달인이었음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병법의 지식에 기초해서 우중문이 병법의 기본인 '천문'과 '지리'를 전혀 모르는 얼치기임을 반어적인 시로 드러낸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아래와 같이 평가한다.
"수나라에 비해 국력이 훨씬 약했던 고구려가 양제의 거대한 대군을 거의 전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을지문덕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었다. 그가 전술적 기만과 심리전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적군을 피로하게 만들고, 결정적인 순간에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을지문덕이 없었다면, 고구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을지문덕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이 단순히 숫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손자병법』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전쟁은 싸우기 전에 이미 승리를 보장한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겨 놓고 싸운다'는 말이 이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충담사의 '안민가'
『삼국유사』에는 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향가'들이 실려 있다. 이 향가는 그 배경설화와 함께 문학에서 다루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삼국유사』도 엄연한 역사서이다. 『삼국유사』의 향가들은 문학사적으로도 귀중하지만 역사적으로도 매우 소중하다.
여기서는 향가 '안민가'와 함께 '안민가'가 지어진 경덕왕에 대해 알아보자.
안민가는 말 그대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노래'이다. 향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이고 신하는 어머니, 그리고 백성은 어린아이라는 말이다. 이는 한 국가를 가족에 비유한 것이다. 백성을 국가의 소유물로 바라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지 말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가족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백성을 자기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아니라 돌보고 보호하는 대상, 곧 목적으로 바라보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잘 먹여 살리는 것이다. 민생을 책임지라는 말이다. 그럼 백성들이 우리나라가 제일이니 우리가 어디로 가겠는가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백성도 백성다우면 나라가 태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경덕왕은 성군인가?
'안민가'의 창작배경에는 경덕왕이 있다. 경덕왕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최고 보물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고 나아가 '안민가'라는 애민의 노래를 짓게 한 왕인 경덕왕은 어떤 왕이었을까? 그는 성군이었을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경덕왕은 국가의 안녕과 평화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가문의 유지를 위해 권력을 남용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경덕왕의 무분별한 사리사욕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같이 실려있다.
경덕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당대의 고승인 표훈대사를 불러 하늘에 빌게 한다. 이에 표훈대사는 하늘의 천제를 만나 경덕왕에게 아들을 낳게 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딸은 가능하지만 아들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덕왕은 막무가내로 아들을 원한다. 딸을 아들로 바꾸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는 국가의 미래보다 자기 가족의 사욕을 챙긴 왕이있던 것이다.
그렇게 경덕왕이 얻은 아들이 훗날 혜공왕이 되는데, 그는 원래 여자였던지라 평소에도 여자처럼 행동했고, 어지럽게 여러 도사들과 어울리다가 결국은 선덕왕이 되는 김양상에게 폐위당하여 죽는다.
이 모습을 보면, 경덕왕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이유도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만들었다기 보다는 개인의 왕권 강화와 극락왕생을 염원하며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불국사는 완공까지 24년이 걸렸다. 경덕왕이 시작했으나 그의 아들인 혜공왕 때에 완공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에 걸쳐 불국사를 세우는 기간 중에는 수많은 자연재해와 기근이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경덕왕은 공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온 나라가 흉흉하고 결국은 오악과 삼산의 신들이 궁궐에까지 나타났다. 오악 삼산의 신들조차 왕에게 무엇인가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 나라의 왕이 취해야 할 정책은 무엇이어야 할까?
당연히 냉정하게 판단하여, 공사를 잠시나마 멈추든가 빈민을 구휼하는 애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어야 한다. 하지만 공사를 멈추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결국 경덕왕이 취한 행동은 영험한 고승을 불러 '향가'를 짓게 하는 것이었다.
향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늘과 땅은 물론 귀신까지 감동시키는 영험한 노래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경덕왕은 충담사를 불러 정책에 대한 현명한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향가라는 노래의 주술적인 힘을 빌려 국면전환을 노린 것이다.
이에 충담사는 경덕왕의 부탁을 받고 '안민가'를 지어 바치기는 하는데, 그는 그런 경덕왕에게 '주술'이 아닌 구체적인 통치의 '방법'을 제시하는 노래를 지어 바친다. 그것이 바로 '안민가'라는 노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안민가'는 주술의 노래가 아닌 애민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노래였다.
충담사는 이 노래를 바치고, 경덕왕이 내리는 왕사의 지위도 거절한다. 충담사는 나라의 운영을 주술의 힘이 아닌 구체적인 민생정책의 실현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또한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노래를 지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부디 이 노래의 내용처럼, 백성을 권력의 수단이 아닌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 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을지문덕'과 함께 『삼국유사』의 '안민가'를 살펴보았다.
'을지문덕'은 국가의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자기 몸을 바쳐 국가를 구해냈다. 그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철저히 '지피지기'의 태도를 가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충담사'는 개인의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경덕왕에게 충심으로 '애민'을 위한 노래를 지어 바쳤다. 주술을 원하는 왕에게 구체적인 민생의 실천 방법을 제시하였다.
최근 우리나라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