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역사 6 가깝고도 먼 아버지와 아들
'크로노스'와 '오이디푸스'
『영원한 제국』에서 파생된 질문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은 『남한산성』 이상으로 흥미진진했던 팩션(faction)이다. ‘정조는 과연 독살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창작된 소설이다.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소설을 다 읽고 나서는 조선후기에 펼쳐진 당쟁의 역사가 한눈에 정리될 만큼 구체적이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임오화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는 무엇이 사실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소설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역사적 지식을 확장해 나가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았다.
영조는 정말 경종을 독살했을까?
아버지 영조는 왜 아들 사도세자를 죽였을까?
권력은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말 사도세자는 미치광이였나?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건 손자인 정조라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나?
영조는 어머니가 무수리여서 엄청난 열등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
그게 원인이 되어 아들을 혹독하게 교육했고, 그래서 사도는 삐뚤어지기 시작했나?
영조처럼 자기 아들을 죽인 왕이 또 있었나?
책을 하나 읽고 질문에 질문이 꼬리처럼 이어졌다. 그런 게 바로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부자(父子) 관계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때로는 극적인 긴장과 갈등을 동반한다.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을 읽으며 떠오른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니, 실제로 역사 속에서 영조처럼 아들과 첨예한 갈등을 겪었던 왕이 존재했다. 바로 고구려의 유리왕이다.
고주몽의 친아들 유리왕, 피는 물보다 진하다.
유리왕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의 아들로,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이다. '유리'는 주몽이 동부여를 떠날 때 남겨두고 온 핏줄이었다. 주몽이 새로운 나라를 세운 뒤에도, 그의 존재는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주몽이 동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 주몽은 동부여에 남겨진 부인 예씨와 어린 '유리'를 데려가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 아들이 자신을 찾아올 날을 대비해, 한 자루의 칼을 부러뜨려 반쪽은 자신이 가지고 떠나고, 나머지 반쪽은 대들보 기둥 아래 남겨두었다. 유리는 성장한 후, 어머니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칼을 찾아 아버지를 찾아간다.
유리가 마침내 주몽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부러진 칼의 반쪽을 내보이며 자신이 주몽의 혈통임을 증명했다. 주몽이 가지고 있던 칼의 나머지 반쪽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순간, 주몽은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유리를 태자로 삼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분노한, 주몽의 아내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다. 유리가 태자가 되는 순간, 그녀의 아들들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에 순순히 내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 과정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치열한 권력의 암투가 있었을 것이다.
주몽은 고구려에서 전혀 기반이 없던 유리를 위해 유력한 집안의 송씨를 아내로 맺어주었다. 송씨의 아버지는 '송양'으로 주몽이 내려오기 전에 지역의 왕으로 불렸다. 반면 소서노의 아버지는 연타발인데, 연타발 또한 졸본부여왕으로도 불렸다. 이들은 주몽이 내려와 고구려를 세울 때 복속당한 세력이지만, 고구려를 지탱하는 유력한 집안들이었다.
역사계에서는 이 사건을 고구려의 중심 세력이 소노부에서 계루부(桂婁部)로 전이(轉移)됨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유리왕의 아들 해명태자
그렇게 힘들게 왕위를 계승한 유리왕은 즉위 후에도 순탄한 길을 걷지는 못한 듯하다. 고구려는 여전히 건국 초기로, 국가의 기반이 확고하지 않았으며,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 또한 민감한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태자 해명이 황룡국의 사신이 가져온 활을 부러뜨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천도한 뜻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해명이 힘이 센 것만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불효하다." 『삼국사기』 유리명왕 조(條)
유리왕이 강조한 것은 단순한 아들의 실수가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다. 해명이 황룡국 사신이 가져온 활을 부러뜨린 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심각한 도발 행위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변국과의 관계가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에서, 작은 외교적 마찰이 곧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더욱이 고구려는 여전히 국경을 방어하고 왕권을 공고히 다져야 할 시기였기에, 불필요한 충돌은 왕국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유리왕에게 해명태자의 행동은 단순한 불손함이나 불효가 아니라, 고구려의 안위를 뒤흔드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왕권이 완전히 공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자의 경솔한 행동이 주변국과의 불화를 일으킨다면 이는 곧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결국 유리왕은 국가의 안정을 위해 태자 해명의 자결을 명한다.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냉정한 판단이었다. 비록 아들이지만, 그를 용서한다면 왕권이 흔들리고, 나아가 고구려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유리왕은 스스로 칼을 내려주며, 해명에게 죽음을 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부자가 혈육의 정을 끊고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은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명타자의 죽음으로 인해 요행으로 왕인 된 사람이 대무신왕이다. 그는 유리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대무신왕의 맏아들은 호동왕자이다. 호동왕자는 낙랑국을 점령하는데 낙랑공주의 마음을 이용하여 자명고를 찢게 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호동왕자는 아버지 대무신왕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욕망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큰아버지 해명태자의 이야기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동의 결말도 비참하다. 너무 잘 나가는 호동왕자를 질투한 계모의 지속적인 참소로 인해, 호동도 결국은 아버지의 의심을 받는다. 그리고 호동왕자도 결국은 자결하고 만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게하는 대를 이은 불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크로노스 콤플렉스의 사례들
비슷한 사례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역시 아버지와 갈등 끝에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인조는 오랑캐로 여겼던 청의 황제 '홍타이지' 앞에서 겪은 '삼전도의 굴욕'을 잊지 못했다. 그렇기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온 소현세자의 '북학'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소헌세자의 의도를, 심지어 자기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겼다. 어쨋든 인조는 청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소현세자에게, 칼은 아니지만 벼루를 집어 던졌다. 그게 직접적인 원인이든 아니든 소헌세자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소헌세자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며느리 강빈과 손자 석철은 인조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역사와 신화 속에서 부자 관계는 서로를 지키는 동지적 관계이기도 하지만, 왕권과 권력 앞에서 죽고 죽이는 관계로 돌변하기도 한다. 주몽은 유리에게 칼을 내려 주었고, 유리는 해명에게 칼을 내렸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역경을 극복하는 동반자가 될 수도 있지만, 유리와 해명처럼 돌이킬 수 없는 증오로 맞설 수도 있는 운명을 지녔다는 말이다.
이처럼 부자지간의 반목이 비극으로 치닫는 사건은, 신화에서도 반복된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크로노스는 '자식이 자신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두려움에 아들들을 삼켜버린다. 그러나 결국 아들 제우스에게 패배하고 스스로 몰락한다.
반대로,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죽이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를 가지고 '크로노스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심리학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하는 동시에 두려워 하며 질투하면서도 롤모델로 삼는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아주 가깝고도 먼 사이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