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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길

인문학의 도구 : 역사 8 최초의 여왕, 그 무거웠던 책임감

by 양심냉장고

전지전능한 여왕, 선덕?


『삼국유사』 제4권'에는 '지귀'에 대한 짧은 기록이 있다. 선덕여왕이 영묘사에 방문했을 때 지귀가 탑을 불태웠으나 혜공이 새끼줄로 맨 곳은 타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삼국유사』에서 짧게 다룬 이 지귀의 이야기는 원래 ‘심화요탑(心火繞塔)’이라는 제목으로 신라의 설화집 『수이전』에 실렸었다고 하는데, 이후 조선시대의 『태평통재』나 『대동운부군옥』등에 재수록되어 설화의 전모가 전해지고 있다.

이 '지귀설화'의 핵심은 선덕여왕이 매우 아름답고 인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흠모한 지귀를 나무라지 않고 팔찌를 선물로 준다. 지귀는 그런 선덕여왕의 미모와 인자한 마음을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에 불이 일어나 불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호환이나 마마는 물론, 불을 매우 두려워했다.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과 처방은 '김현감호'와 같은 설화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마마에 대한 두려움과 처방은 '처용가'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불에 대한 두려움과 처방이 드러나는 설화가 바로 '지귀설화'이다.

지귀설화만 놓고 보면 선덕여왕은 최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은 물론, 미모와 인자함은 천하제일이며, 더구나 신라인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불귀신조차 다스리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보여진다.

이외에도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지혜와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선덕여왕 지기삼사'이다.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꽃이 향기가 없을 것을 미리 알고, 옥문곡에 침입한 백제군을 물리치고, 자신이 죽어 묻힐 곳이 도리천이 될 것임을 예견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선덕여왕이 여왕으로서 얼마나 힘들게 왕위를 유지하고, 노심초사 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아버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성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왕이 되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선덕여왕의 등극을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선덕여왕의 통치능력을 의심하고 흔들었다.

이러한 선덕여왕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통치역량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한 노심초사의 흔적들이 바로 『삼국유사』와『삼국사기』에 나오는 여러 기록들일 것이다.

여왕이지만 누구보다 훌륭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알리고 보여주어야 했을 것이다. 일종의 여론전이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으니 이런 신화같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참으로 힘든 나날이었을 것이다.


파란만장했던 선덕여왕의 삶

김부식의『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의 치세를 '여자를 받들어 세워서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요,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라고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꽃 그림 이야기가 등장한다. 김부식도 선덕여왕이 꽃향기가 없을 것을 미리 알아보는 식견을 칭찬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선덕여왕은 즉위 원년부터 친정을 하지 못하고 대신이었던 '을제'가 정치를 총괄했으며, 또한 원년부터 가뭄이 심하게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 수군댔을지 짐작할 만하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한 구휼 정책을 초반에 많이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나라에는 사신을 파견하면서 책봉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당은 미루고 미루다가 4년째에 비로소 책봉 문서를 내린다. 『화랑세기』필사본에 의하면, 당나라는 세 명의 남자를 두고도 후사를 얻지 못한 선덕여왕을 모욕하며 모란꽃 그림을 보낸 것이라고 했다.

즉위 2년 째에는 지진이 일어나 민심을 흔들었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부처님의 가호를 빌면서 3년째에는 향기나는 절, '분황사'를 완공하지만, 야속하게도 바로 그 해에 크기가 밤톨만한 우박이 내렸다.

4년째에는 드디어 기다리던 책봉 문서가 당나라에서 도착하면서 왕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의 마음 고생이 심했던지, 5년째에 선덕여왕은 매우 심각한 병을 얻는다. 몸이 아픈 것 보다는 마음의 병이 더 심했을 것이다.

같은 해 5월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옥문곡에 든 백제군사를 미리 알고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긍정적인 어조와는 다르게 『삼국사기』의 어조는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백제의 군사가 침임한 것을 어찌 알았는가 하니, 궁월의 옥문지에 개구리가 많은 것을 보고 알아맞췄다는 것이다. 적의 침입을 이런 식으로 알아맞추는 것을 병법에서는 무엇이라 할지 모르겠다. 신기한 일이기는 하지만, 매사에 적군의 침입을 이런 식으로 대비한다면 오히려 군심만 더 흔들었을 것이다.

8년째에 바닷물이 붉어지고 바닷물이 따뜻해지면서 수많은 물고기와 자라가 죽는데, 이는 이는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징조였다. 그리고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입이 이어진다. 의자왕은 신라를 공략하여 국경 지역의 40여성을 빼앗았고 대야성 전투에서는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낸다. 백제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신라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한다. 한강 이남의 땅을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김춘추를 돌려보낼 생각도 없었다. 김춘추는 선도해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쳐 나오는데, 이때 선도해가 김춘추에게 알려준 이야기가 '별주부전'의 배경설화인 '귀토지설'이다.


김춘추는 다시 신라로 돌아와서 이제는 당나라로 향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고 싶은 야심에 목말랐던 상황인지라, 먼저 백제를 견제하자는 김춘추의 말대로 나당연합을 이룬다.

심청이의 배경설화도 이때 나오는 것으로 보면 된다. 신라와 당나라가 정치와 경제적으로 가까워지면서 두 나라를 오가는 상선들이 급격히 늘면서 해상에서 일어나는 불의의 사고도 많아졌다. 이때에 바닷길에 나서는 사람들이 인신공양하는 일들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선덕여왕은, 외교는 김춘추에게 맡기고 군사는 대장군 김유신에게 맡긴 채, 외국의 침입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자장법사의 요청으로 황룡사 탑을 세운다. 하지만 문제는 밖이 아닌 안에서부터 일어나서,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여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선덕여왕은 비담의 난이 한창이던 와중에 쓸쓸하게 죽는다.


김부식은 이러한 선덕여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끝에, 여왕이 나라를 다스림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아주 야박하게 기록했다. 최초의 여왕이 되어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유학자였던 김부식과 이후의 역사는 여왕의 치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삼국유사』일연의 재평가

『삼국사기』의 부정적인 평가와는 다르게, 일연의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의 치세를 매우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앞의 지귀설화와 함께 선덕여왕의 식견과 예지능력이 매우 탁월했음을 극찬하고 있다.

당시에 여러 신하가 왕에게 어떻게 꽃과 개구리 두 가지 일이 그렇게 될 줄을 알았는가 물었다.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당제(唐帝)가 나의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말한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남근은 여자의 음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었음을 알았다.” 하였다. 이에 군신들이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모두 감복하였다. 꽃을 삼색으로 보냄은 아마도 신라에 세 명의 여왕이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니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 바로 이들이다. 당제도 헤아림의 밝음이 있었다.
선덕왕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별기(別記)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권 1 기이,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


무엇보다 일연은 선덕여왕이 국난을 불교신앙으로 극복하려 한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분황사를 완공했고, 영묘사를 창건했으며, 별기에는 첨성대를 쌓은 일도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덕'이라는 이름도 그 자체로 매우 불교적이다.


선덕여왕의 왕명인 '선덕'이라는 이름은 물론 불교적인 것으로 불경에 보이는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선덕'이라느 이름을 사용한 사람들은 불경에 여러 명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대방등무상경』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을 모범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선덕바라문은 불법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교화할 전륜성왕의 전형으로 인도에 실존했던 아소카왕이 될 인연을 이미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석가모니의 사리를 잘 받들어 섬겨 장차 도리천의 왕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자신은 도리천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는 사실과 바로 연결해 볼 수 있다.

남동신, 『한국사연구』 '자장의 불교사상과 불교치국책'


일연은 신라가 멸망한 이유를, 도교가 들어와 불교 사상이 혼탁해진 데서 찾는다. 그래서 고려 말엽 몽고의 침입 상황에서도 이를 염려하면서 고려가 다시 불교 사상으로 통합되기를 염원하며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이다. 그런 일연의 시각에서 선덕여왕의 불심은 일연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김춘추와 김유신같은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게 한 노력이 빛을 발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원천이 되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연은 고려말의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던 선덕여왕을 재평가했다.


선덕여왕은 집안의 장녀였다.

선덕여왕의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이다. 아버지 동륜태자의 죽음으로 자칫 왕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그의 작은 아버지 사륜왕(진지왕)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극적으로 왕이 되었다. 법흥왕 이후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 왕족은 자신들을 부처의 일족으로 믿었다. 그리고 진평왕은 자신이 부처의 아버지요 자신의 아들은 석가모니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진평왕은 아들을 얻지 못한다. 왕실의 체통은 딸에 떨어졌다.

선덕여왕은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지만, 여자로 태어나 왕실의 체면을 떨어뜨렸다. 선덕여왕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늘 죄인이 된 기분으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진평왕은 둘째도 딸을 얻는다. 그녀는 나중에 김춘추의 할머니가 되는 천명부인이다. 그럼 셋째는 과연 누구일까? 역사적인 실존인물인지 논란이 있지만, 진평왕의 셋째 딸은 앞에서 살핀,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이다.

참고로, 선화공주는 그 누구보다 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도 잘 듣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모습을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셋째딸 콤플렉스'라고도 한다. 선화는 정말 착하고 말 잘듣는 공주로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담이 돌기 시작하고 음탕한 여인이라는 오명을 쓰고 쫓겨난다. 진평왕은 아들을 얻지 못한 분노를 셋째딸 선화에게 다 풀었는지도 모른다. 뜬금없는 소문만 믿고 궁에서 쫓아내는 진평왕의 태도는 이런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럼 선덕여왕은 어떻게 성장했을까? 그녀는 아들이 없던 진평왕 아래에서 강인한 책임감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한 책임감은 그녀로 하여금 ‘장녀 콤플렉스’를 만들게 했을 것이다. 힘들지만, 쉽게 힘들다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반대와 의구심 속에서도 그는 결국 여왕의 자리에 올랐고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을 다한다. 자신의 지혜와 인자함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되려고 했다.



이게 다 선덕여왕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주 작은 문제만 생겨도 사람들은 '그게 다 선덕여왕때문'이라고 험담을 했다. 분황사와 영묘사, 황룡사를 쌓으며 불심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외국의 침입을 막아보려는 노력도 쉬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여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상대등 비담은 여왕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 성장과정이 마음의 병이 되어 즉위 5년에도 그리고 또 말년에도 심각한 병이 되었을 것이다. 그건 분명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의 병이었을 것이다. 지난 과거의 삶이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 아무도 가보지 않은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던 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덕여왕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는 왕이 될 수 있었다.


아마도 선덕여왕은 죽으면서 아버지인 진평왕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영화 국제시장의 대사처럼 '아버지 나 이만하면 잘 살았지요?' 이렇게 말했을까?


선덕여왕.png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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