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종교와 철학

인문학의 도구 : 철학 1 종교와 철학 그리고 주술

by 양심냉장고

인문학의 도구 철학

인문학은 문학과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학문은 인문학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좋은 영화나 연극, 음악과 미술, 심지어 스포츠 경기도,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도구로 쓰인다면 인문학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도구로서 가장 주목받는 도구는 누가 뭐래도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AI와 구별되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은 미래사회에 가장 가치 있는 인문학 도구가 될 것이다.


종교와 철학의 차이

종교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찾기 보다는, 궁극적인 답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세상의 기원은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주고 믿고 따르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종교의 특징이다.


반면, 철학은 인문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학문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 또는 실존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진다. 그런데 꼭 그렇게 거창한 것만이 철학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면 잘 할 수 있는가?'와 같은 것도 다 철학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질문, 흔히 '개똥철학'도 철학이다. 철학은 그냥 질문하는 것이다. 때로는 당연하게 여기는 통념을 뒤집어 엎어서 불편하게도 만들고, 그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따진다.


소크라테스는 '산파법'으로 유명하다.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며 '너 자신을 알라'고 다그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 소크라테스를 그리스의 정치인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로 여겼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명분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보면, 그는 "악법도 법"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외국으로 피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이 믿는 철학적 가치를 위해 독배를 들었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성현들의 특징은, 진리를 위하여 목숨도 하찮게 여기는 특징이 있었다.


데카르트 또한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이 철학의 출발점임을 강조했다.


칸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인식을 강조했다면, 칸트는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그는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의 인식 구조에 의해 필터링된 결과일 뿐, 사물 그 자체(noumenon)는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를 ‘인식의 한계’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의 감각과 이성이 만들어낸 현상(phenomenon)’일 뿐, 실제로 사물이 본래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단순히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리의 경험적 사고 방식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적인 진리를 알 수 있을까? 칸트는 이에 대해 "우리는 사물 자체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이성이 만들어낸 구조 안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답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철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는 충분히 보여준다.


주술도 인문학인가?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몰라 답답하거나 미래가 불안할 때, 점을 보러 '철학관'을 찾아가는데, 왜 점을 보는 곳을 ‘철학관’이라고도 하는지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철학은 질문하고 답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점을 보러 가는 곳도 인생의 답을 알고 싶을 때, 질문하러 가는 곳이기에 '철학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관의 주술은 인문학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물론, 최근 젊은이들이 오늘의 운세나 점보는 일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기사들이 눈에 띈다. 그냥 재미로 본다고 하지만, 또한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는 복잡해지고, 인간관계도 쉽지 않은 시대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답답하고 불안해졌다. 그래서 답답하고 불안한 사람들은 ‘신경안정제’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사람들을 이끌어 줄 어른들과 정신적인 리더들이 사라졌다. 권위가 사라지고 꼰대질만 늘어났다.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정치 지도자가, 한술 더 떠 주술에 빠지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니 국민들은 더욱 혼란하다.

보편적 진리로서 인생의 해답을 주어야 하는 종교도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최근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논란이 된 교회세습의 문제나 일부 교회지도자의 극단적인 행동은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를 급격히 떨어드리고 말았다. 하지만 꼭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불교도 승려가 되겠다고 출가를 결심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감소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정치나 종교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혼자만의 경험으로는 한계가 있다. 독서는 쉽지 않고, 독서 대신 선택하는 드라마나 영화, 스포츠와 오락은 지속적인 성찰과 위안을 주지 못한다. 다양한 자기계발과 인문학 강의 등이 유행하기도 하지만, 깊이 있는 사색과 통찰을 주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점과 같은 주술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적 권위를 내세워 “이러하니, 이렇게 살아라”고 강력하게 명령한다. 영화 ‘서울의 봄’의 명대사는 “사람들은 강력한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 주길 바란다”라는 인간의 심리를 통찰하고 있다. 주술은 형식적으로 그러한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삶의 정답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진리가 여기에 있다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무당이나 교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대중의 환심을 사는 방법에서 그 누구보다 탁월한 인간들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누구라도 현혹될 수 있다.


인생의 답을 너무 쉽게 찾으려는 것은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자신만의 노력이 없다면 그건 인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몇 푼 돈을 주고 주술이나 미신에 의지하여 답을 얻으려는 행위는, 단순한 오락거리는 될 수 있지만 인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신학은 인문학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더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종교의 신학은 인문학인가?

만약 종교가 맹목적인 신념과 단순한 기복 신앙일 뿐이라면 그 종교와 신학도 주술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복 신앙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일 뿐,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탐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편적이고 건강한 종교, 그리고 그 종교의 신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올바르고 건강한 종교와 신학은 단순히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만을 제공하는 것에서 멈추면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성찰을 요구해야 한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자비이며, 무엇이 헌신인지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종교는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신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윤리적 가치를 탐구하며,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끊임없이 되묻는다면, 종교와 그 신학은 인문학적 탐구의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종교는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는 말하고 있다. 또한 신 앞에 홀로 선 존재로서 '코람데오'의 삶을 말한다. 유교에서는 혼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신독'을 강조했으며, 불교도 끊임없는 참선을 강조했다.

종교가 맹목적인 내세와 기복만을 추구하는 순간, 종교는 인문학의 길에서는 멀어진다. 반대로, 종교인으로서 더 나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한다면 종교는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The_Creation_of_Adam_perspective_fix.jpg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20화선덕여왕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