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역사 7 화랑세기
박창화『화랑세기』필사본 진위 논쟁
김부식의『삼국사기』열전 제 6에는 '설총'의 이야기 뒤에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지었다는 내용이 짧게 언급되어 있다.
김대문은 누구인가? 그의 집안은 1대 위화랑과 4대 이화랑을 비롯해 역대로 화랑을 많이 배출한 귀족 집안이었다. 28대 오기공은 김대문의 아버지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영웅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김대문은 『화랑세기』를 통해 32대에 걸친 화랑의 역사를 편찬한 것이다. 자기 가문의 족보를 정리하는 것은 물론, 통일신라 이후 문약해지고 존재감을 잃어가는 화랑의 재건을 염원하였을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쓸 때, 『화랑세기』를 상당히 중요하게 활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오랫동안 역사에서 사라진 책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학계에는 박창화가 필사했다는『화랑세기』가 등장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5년 박창화 사후, 유족이 보관하던 유고 문서에서 발견되어, 1989년 경북대 이종욱 교수를 통해 학계에 처음 공개되었다. 이후 문헌학적 진위 논쟁이 이어졌고, 현재까지도 위서 여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진본 주장
- 전체적인 문체와 내용이 신라 시대의 문화를 깊이 있게 반영하고 있음
- 여러 고대 문헌과 일치하는 부분 다수 존재
- 신라 귀족사, 여성사, 혼인제도 등에서 획기적 자료
위서(가짜) 주장
- 문체가 조선 후기 혹은 현대 필체와 유사함
- 고대 한문 문법에서 어색한 부분 발견됨
-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인물, 사건 등장
- 박창화가 풍수와 역사에 조예가 깊은 만큼 창작 가능성
김태식의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이 책은 김태식이 『화랑세기』필사본이 위작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쓴 책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진위논쟁을 떠나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화랑세기』필사본은 위작보다는 진본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위작이라면 박창화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모든 인물들의 관계를 다 꿰뚫고 있는 천재중의 천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들은 사실 필사 과정에서 얼마든지 발생 가능한 일이다. 필사자는 필사 과정에서 자기가 쓰기 편한 한자나 허사 등을 임의로 사용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필사자는 필사 원본의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기가 쓰기 편한 글자로 얼마든지 변용하여 필사할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나 사건이 등장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화랑세기』를 자료로 쓰여진 2차 텍스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취사선택을 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삼국사기』는 유교적인 충효를 위해, 그리고 『삼국유사』는 민족적이고 불교적인 저술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들은 과감하게 삭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화랑세기』의 내용은, 아무리 개방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충격적인 내용이 매우 많다. 그렇기에 유교와 불교적인 시각으로 용납되지 않는 '근친혼'이나 '동성애'와 같은 내용은 과감히 삭제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창화가 아무리 풍수와 역사에 조예가 깊다고 한들, 당시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까지 상상력을 동원했다고 보기에는 무리인 것들이 많다.
또한 결정적으로 박창화가 『화랑세기』를 필사하여 얻는 이익이 무엇이냐는 의문이 남는다. 『화랑세기』필사본을 쓸 정도의 지식과 노력이라면, 차라리 그 노력으로 신라시대의 정통 역사서를 정리하는 학술 서적을 내는 게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데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는 진본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사본『화랑세기』에 담긴 내용과 진본의 근거들
저자는 『화랑세기』가 진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양한 근거를 들면서 강조한다. 책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고, 이를 기반으로 그가 주장한 내용들을 정리해 가도록 하자.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은 남편 구리지는 물론이고 남편 사후 지속적인 섹스파트너였던 설성마저 전사하자 과부로 있으면서 무관랑을 자주 불러들여 관계를 가졌다. 이에 무관랑은 주군인 사다함과의 관계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런 무관랑을 사다함은 오히려 이해하며 타일렀다. 이에 깨달은 바가 있어 무관랑은 어느날 월성 궁궐 안 금진낭주 처소에서 도망쳐 궁궐 담장을 뛰어넘다가 구지(溝池)에 빠져 크게 다쳐 죽었다. 무관랑의 죽음을 애통히 여긴 사다함 역시 이 때문에 병들어 앓다가 7일 만에 따라 죽었다.
이것이 필사본에 실린 사다함과 무관랑의 이야기의 골자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에서
경주에는 월성이 있다. 월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8년에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고 하는데, 조사 결과 성벽 바깥에서 해자 시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평범한 해자(垓子)가 아니라 연못과 연못을 만들고 그 사이를 도랑으로 잇는 '구지(溝池)'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1998년에야 비로소 밝혀진 구지의 실체를 박창화가 어떻게 알고 필사본에 쓸 수 있느냐는 것이 첫 번째 주장이다.
그런데, 위 글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과 삶이 심상치 않다. 사다함이 누구인가 가야국 정벌의 일등공신이자 '미실'과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신라의 영웅이다. 그런데 『화랑세기』필사본에는, 그런 영웅의 어머니 '금진'이 남편인 '구리지'가 사망하자, 설성에 이어 아들의 수하인 무관랑까지 끌어 들여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다함은 또 무관랑의 죽음을 애통히 여기다가 7일만에 따라 죽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사다함과 무관랑이 동성애자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미실은 누구인가? '고현정'이 열연한 인물로 유명해진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을 색도(몸시중)로 섬긴 신라의 여성 권력자로 그려진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고,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이니, 미실은 3대에 걸쳐 신라의 왕을 좌지우지 한 것이다. 이런 내용은 아무리 개방적인 사람일지라도 용납하기 쉽지 않은 내용인지라, 『화랑세기』를 진본으로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필사본에는 '송출정가'와 '청조가(靑鳥歌)'가와 같은 향가도 소개되어 있다. '송출정가'는 미실이 대가야 정벌전에 출전하는 사다함을 위하여 지은 향가이며, '청조가'는 사다함이, 전남편인 '세종전군'에게 돌아간 미실을 생각하며 지은 노래이다.
향가 해독 연구는 일제시대 소창진평이나 이후 양주동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음을 감안할 때, 박창화가 향찰문자를 활용하여 향가를 위작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된다고 말한다.
또한 '구리지(仇梨知)'라는 이름이 쓰이게 된 유래도 『화랑세기』필사본에는 자세히 나타난다. 신라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린 인명이 많은데, 태종(苔宗)을 '이사부' 황종(荒宗)을 '거칠부'와 같이 표현한 것은 한자의 뜻을 빌린 것이고, '구리지'는 한자의 음을 빌린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신라에서 이름을 짓는 방식이 상당히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출생의 비밀이나 생김새, 성격 등을 가지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처음 비량공이 벽화왕후를 그리워했다. 늘 왕후가 다니는 뒷간에 가곤 했다. 법흥대왕이 비량공을 사랑했으므로 이런 행위를 금하지 않았다. 과연 후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으니 그래서 이름을 '구리지'라 했다.
지금도 냄새가 '구리다'는 말을 쓴다. 이 말의 어원이 당시에도 사용되던 말이었음은 언어학자들이 밝히고 있는 바, 말 그대로 '구리지'는 뒷간에서 얻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해학적인 표현인가. 그리고 또한 이 표현은 『화랑세기』필사본이 위작이 아님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 필사자 박창화가 상상력으로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화랑세기』필사본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편,『삼국사기』'열전'에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거나 반면교사로 삼을 인물들이 주로 실려있는데, 뜬금없이 '설씨녀와 가실'의 사랑이야기가 실려있다. 『삼국사기』와 같은 책에 왜 '설씨녀'와 같은 아주 평범한 아녀자의 이야기가 실린 것인지 의문을 가질 만한 상황에서, 『화랑세기』필사본에는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있다.
바로 위에 인용했던 글에 등장하는 '설성'의 어머니가 바로 '설씨녀'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성씨를 물려받은 이유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어머니 성씨인 설씨를 물려받은 것으로 나온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설성이 '원효대사'의 조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원효의 아들은 이두를 만든 '설총'이다. 원효대사의 성씨는 설씨인 것이다. 이렇게 유명한, 원효대사와 설총의 조상이었기에 『삼국사기』 에서도 '설씨녀'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소개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은 '설총전'의 끝에 김대문을 소개하면서, 그가 『고승전』이나 『화랑세기』, 『악본』 등을 저술했다고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왜 설총의 전 뒤에 김대문을 소개했을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참고로 김대문이 『고승전』을 저술한 이유로는 원광법사가 김대문의 백증조부이기 때문임도 필사본은 보여준다.
이외에도 매우 흥미로운 것은 선덕여왕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당나라에서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보냈는데, 선덕여왕은 그림만 보고도 향기가 없을 것임을 예측한다. 이 이야기는 선덕여왕의 지혜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화랑세기』필사본을 통해 보면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다.
선덕여왕이 아들을 얻지 못하자, '김용춘'과 '흠반', '을제'와 같은 귀족 남자들을 들여 아들을 얻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를 필사본에서는 '삼서지제'라고 하는데, 선덕여왕은 무려 세 명의 남자를 두고 아들을 얻고자 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선덕여왕은 아들을 얻지 못한다. 불임의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당나라는 선덕여왕을 조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상징적인 설화로 변용되어 후대의 역사서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선덕왕 김양상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선덕왕 김양상이 누구인가?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럼 혜공왕은 누구인가? 딸을 아들로 바꾸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덕왕이 끝까지 원하여 얻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화랑세기』필사본에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데, 김양상이 전통적인 신라 왕실계가 아니라 가야계, 김유신의 친동생 김흠순의 증손일 가능성을 말한다는 것이다. 신라의 왕통이 경주계가 아니라 가야계로 넘어간 것임을 『화랑세기』필사본은 말한다는 점에서, 신라사의 최대 충격파라고 설명한다.
경덕왕의 욕심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진다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임을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화랑세기』의 내용을 통해 보면 이후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더욱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이외에도 『화랑세기』필사본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골품제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는 점, 포석정이 유흥의 공간이 아닌 신성한 제사를 드리는 포석사임을 보여준다. 박제상과 치술령에 얽힌 설화의 이면, 환갑의 나이에 김춘추의 딸인 지소공주와 결혼한 김유신과 그의 가족에 얽힌 사실, 대영웅 문노의 아들 '금강'이 김유신보다 먼저 상대등이 된 이야기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도화녀 비형랑 설화나 심청의 인신공양 설화도 그 배경을 추측할 수 있는 근거 등이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내용을 여기서 다 정리하기는 무리다. 다만 이러한 풍부한 자료를 근거로 박창화가 필사한『화랑세기』는 위작논란을 넘어 신라시대의 문화와 문학,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화랑세기』는 공식적으로 진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특히 정통 사학계에서는 위작으로 보는 견해가 여전히 우세해 보인다.
너무나 낯선 신라의 이야기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를 쓴 김태식은 책의 서문에서, 정통 사학계에서 『화랑세기』필사본을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을, '20세기 한국고대사학계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화랑도를 통해 현좌충신(賢佐忠臣) 양장용졸(良將勇卒)의 신화를 구축한 상태이며, '지금까지 연구한 신라 화랑도의 역사상 및 신라 향가와는 너무나 모습이 판이하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드네들이 지금껏 구축한 화랑도와 향가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자 사실이라는 것이며 여기에서 엇나가는 자료는 『화랑세기』가 아니라 『화랑세기』할아버지가 출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일 것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런 논리 그 어디에도 그네들의 연구가 지금껏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나 일말의 우려조차조 배제하고 있다. 나는 이를 지적 오만이라 진단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화랑세기』필사본에는 현대인의 관점으로도 이해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다. '용양신'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귀족들의 동성애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과 옥진의 교신상이 사당에 모셔지고, 이들을 신으로 섬기는 의식이 있었다는 내용은 상상력을 넘어서는 기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부터 신라의 무덤에서 남녀간의 성행위를 묘사한 수많은 토우들이 출토되는 사실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이후 신라의 왕족은 부처와 같은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고 말하며 순수혈통을 잇기 위해 근친혼이 일상이었고, 미실과 같은 여인은 색도로서 세 왕을 내리 섬기며, 권력자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왕실에서 여성들의 권리가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음은 '전군의식'에서도 나타난다. '전군'은 왕의 아들이나 왕자의 한 종류로 보는데, 놀랍게도 왕비가 왕 외에 다른 남자와 사통하여 얻은 아들도 '전군'으로 봉하였음을 필사본에선 확인할 수 있다. 왕과 왕비는 모두 다 신성한 존재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여자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후사가 없던 선덕여왕이 세 명의 남자를 얻어 후사를 보려고 했다는 내용과도 맥락이 통한다.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선덕여왕도 만약에 김용춘과 같은 왕족의 남자로부터 자녀를 얻으면 그 자식 또한 '성골'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세 남자를 들여 후사를 얻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화랑세기』필사본에는 이처럼, 유교적인 이념이나 불교 신앙 안에서도 도저히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러니 역사적인 사실이 아닌 상상력의 산물로, 박창화가 꾸며낸 이야기라는 주장도 과장이 아닐 수 있었던 것이다. 찬란한 신라 문화와 용감무쌍한 화랑에 대한 견고한 인식이 확고한 상황에서 『화랑세기』필사본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흔드는 위험한 책이었던 것이다.
신라인의 눈으로 바라본 신라
패러다임의 전환은 쉽게 오지는 않는다. 패러다임은 그것이 꼭 과학적 사실이거나 진실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주류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 내용이 그 사회에 필요하기 때문에 채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세시대에 천동설이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채택되듯이, 현대는 진화론이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화랑세기』필사본이 1989년에 공개된 당시에, 내용을 검토하던 학자들은 익히 알고 있던 신라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내용에 상당한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존의 학자들은 깊이 있는 검토보다는 위작으로 치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사실이어도 현좌충신(賢佐忠臣) 양장용졸(良將勇卒)의 진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상상력이 만들어 낸 위작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화랑세기』필사본이 진본일 수 있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공식적인 글에서도 근거자료로 인용되는 사례가 잦아지는 느낌이다.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화랑세기』필사본의 내용은 이미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화랑세기』필사본은 자연스러운 우리 역사의 일부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이 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넘고, 현대인의 윤리의식을 넘어, 신라인의 눈으로 바라본 신라의 모습이 다가 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