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역사 3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한 이유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사마천의 『사기』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사기』의「열전(列傳)」은 인문학의 중요한 질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흥미롭게 알려주는 도구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한 이유 역시 인문학적 질문에서 비롯된다. 그는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가?', '세상의 정의는 과연 실현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로 『사기열전』을 시작했다.
"천도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나를 매우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백이와 숙제는 어진 사람이었지만, 공자가 이들을 칭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안연은 배움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가는 것처럼 공자가 그를 칭찬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중략)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시골에 묻혀 살면서도 덕행을 쌓아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사람이라고 해도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훗날 자기의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
호승희 편역, 『사기열전』
사마천은 선한 자들이 비극적 최후를 맞거나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못하고 묻히는 반면, '도척'과 같은 악인들이 평생 즐기면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현실에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부끄러움을 참아 내고 살아남았고, 살아서 자신이 질문하고 얻은 답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선한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궁형(宮刑)의 치욕을 견딘 것이다. 그리고 『사기』를 완성했다.
저는 천하의 산실(散失)된 구문(舊聞)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成敗興亡)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하였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고(草稿)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과 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이나 주륙(誅戮)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한서(漢書)』 '보임안서(報任安書)'
그렇다고 해서 사마천은 역사에서 잊혀질 뻔한 인물들만을 『사기』에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선한 이들만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으며, 악인들은 악인들대로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두고두고 평가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역사 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후세를 위한 심판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러한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교훈을 얻기도 하고, 악인의 행적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현재와 미래를 위한 지침을 찾는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의 선택과 결과를 살펴보며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으며, 역사는 또한 권력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역사가 두렵지 않은가?"라는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오만과 착각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며, 결국 후대의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냉혹한 평가를 받게 된다.
어제 4월 4일에는 다시 대한민국 역사에서 영원히 남을 일이 하나 있었다. 대한민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된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평범한 일상에 대통령이라는 자가 명백히 불법인 '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계엄이 실패하니까 계몽을 위한 통치술이었다는 언어도단을 일삼았다. 아무리 정치적인 올바름을 위한 결정이라고 변명을 해도,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는 것이다. 제 맘에 안 든다고 체포하고 처단하고 척결하겠다는 인식은 히틀러의 생각과 다를 게 없다.
'똘똘한' 대한민국의 대중들
오늘날 국제 정세는, 중국의 '전국시대' 못지 않은 혼란기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 우리 나라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간을 보내고, 전세계에 유래 없는 위대한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도대체 어느 나라의 대중이 계엄이라는 총칼 앞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국민들의 수준이 높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제의 일은 분명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전화위복'이 되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 때는 대학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현실을 두고 학력의 과잉이라는 말도 많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학력의 과잉은 대한민국 국민을 '똘똘한 대중'으로 만들었다. '똘똘한 대중'은 똘똘한 대중문화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 K-Culture는 전 세계를 사로잡는 매력이 넘치는 문화로 자리잡았다.
어떤 평론가는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도전과 저항의 정신에서 찾기도 한다. '오징어 게임'이 그렇고 '기생충'이 그렇다는 것이다. BTS의 노래가 그렇다고 말을 한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윤과 재미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저항과 도전정신까지 담고 있으니 전세계인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대한민국이지만, '똘똘한 대중'인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수준높은 대중문화를 통해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키고 나아가 현실 정치도 수준높게 이끌어가는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똘똘한 대중' 앞에 '선공후사'하는 정치인들이 나서서 수준 높은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염파'와 '인상여'와 같은 수준은 아니어도 최소한 당리당략을 떠나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더 많이 나타나길 기대한다.
똘똘한 대한민국의 대중들은, 정치인들이 국가와 민족을 우선하는지 아니면 당리당략을 우선하는지 정도는 충분히 판단하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
'염파와 인상여'의 문경지교
『사기』를 읽는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인물 중 하나는 '염파와 인상여'이다. 이들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충신들이다. 인상여는 진나라의 소왕이 조나라의 보물인 '화씨벽'을 빼앗으려고 할 때 자기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켜낸 충신이다. 그리고 염파는 대대로 귀한 집안 출신으로 수많은 야전에서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그런데 인상여의 지위가 염파보다 높아지자 염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다닌다.
"나는 조나라의 장군이 되어 공성야전의 큰 공이 있다. 그런데 인상여는 혀끝을 놀린 노고로 지위가 나보다 위에 있다. 또 상여는 본시 비천한 출신이다. 나는 부끄러워서 그의 밑에 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리고 선언하기를, '내가 상여를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다'고 했다.
호승희 편역, 『사기열전』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인상여는 이후 염파를 피해다닌다. 사람들은 이런 인상여의 행동을 보고, 인상여가 염파를 두려워 하여 비겁하게 숨어 다니는 것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인상여의 가신들도 이런 인상여가 못마땅하여 더 이상은 인상여를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에 인상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들이 염 장군을 볼 때 진나라 왕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상여는 이것을 궁정에서 꾸짖고 그의 뭇 신하들을 욕하였다. 상여가 비록 노둔하다 해도 그까짓 염 장군 정도를 겁내겠는가.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강대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여 지금 두 호랑이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한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국가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미루기 때문이다."
호승희 편역, 『사기열전』
실로 나라의 충신다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인상여의 말 이상으로, 이런 말을 듣고 반응한 염파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염파가 이 말을 듣고 웃통을 벗고 가시 회초리를 지고 빈객을 통해서 인상여의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여 말했다. "비천한 인간인 저는 상경께서 이렇게까지 관대하게 생각해 주시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서로 우의가 통하여 문경의 사귐을 맺었다.
호승희 편역, 『사기열전』
위 이야기는 '문경지교(刎頸之交)'라는 한자성어의 고사이기도 하다. '관포지교(管鮑之交)'에 뒤지지 않는, 두 사람의 우의를 빗대어 쓰이는 말로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친구라는 의미이다.
솔직히 인상여의 말은 듣기에 따라 염파에게는 굴욕적인 말로도 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염파는 인상여의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스스로 가시 회초리를 지고 인상여의 집 앞에 이르러 직접 사죄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출신이 비천하다고 깔보던 사람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용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파'는 '인상여'의 집 앞으로 갔다.
조나라는 이런 충신들이 있어, 전국시대 최강대국인 진나라에 맞서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