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 근로의 기록: 마지막화
봄부터 단풍잎돼지풀의 새싹을 뽑고, 여름에는 질긴 환삼덩굴을, 가을에는 가시박을 제거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천은 맨살을 드러냈다. 이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안도감에 더는 들여다볼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11월 초순, 맨살을 드러낸 하천에 초록빛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게 무얼까?' 하는 궁금증에 하천으로 내려가 보았다. 세상에나! 갓, 배추, 냉이, 꽃다지 같은 로제트 식물들이 이제 막 새싹을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거칠고 강한 생명들에 밀려 숨죽이고 있던 존재들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 숨을 쉬고 있었다. 땅에서 사라진 줄만 알았던 생명들이, 여태 끈기 있게 숨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 경이로운 생명들이여!
어리석게도 1년간 식물모니터링을 하면서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1년 동안의 수고가 주마등처럼 쓰쳐지나가며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보랏빛 윤기를 머금은 갓이 쑥쑥 올라오자 여성근로자들이 퇴근을 미루며 하천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갓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날이면 날마다 수확하는 재미에 집에 갈 일을 잊고 있었다. 한 바구니씩 캐서 가져가고 매니저 것이라며 커다란 비닐봉지에 갓 한 보따리 남겨 놓는다. 하천에서 자란 것이라 오염을 걱정하여 별로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남겨주신 정성들이 고마워 일단은 그 봉지를 들고 퇴근했다. 자기들 것보다 더 많게 내 것을 남겨놓고 가니 마음이 찡했다.
하천가에는 하천의 물로 농사짓는 농가들이 많았다. 주변에는 제법 큰 사과과수원도 있고 비닐하우스도 즐비했다. 근로자들이 쉴 텐트를 쳐야 해서 농가를 배회하며 땅주인을 찾아야 할 때가 있는데 비닐하우스 안을 들여다보다 농약병들이 엄청나서 기겁을 했다. 채소들이 햇빛과 물로 자라는 게 아니라 농약으로 자라는 것 같았다. 우리가 시장에서 사 먹는 채소들이 하천에서 자란 갓보다 나을 게 없어 보였다.
11월이라 추위가 닦아오는데 근로자들이 추위를 피할 곳이 없었다. 소방서에 문의해 보니 야외에서 불을 피우면 소방법에 저촉된다며 말렸다. 나는 두유 한 박스를 사가지고 무작정 하천가의 주말 농장의 문을 두드렸다. 농장주 할아버지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였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할아버지도 농사일로 이 주말 농장을 어렵게 마련하였다고 하셨다. 홀로 사시는 할아버지라 말벗이 그리우셨던지 '커피 타먹으라' 하시며 센베 과자도 내주셨다. 근로자들은 새참 먹을 때마다 할아버지를 챙기고 막걸리 한잔씩 대접해 드렸다. 할아버지는 내심 사람들이 많은 게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고 계셨다.
할아버지 덕분에 화장실 걱정 없이 바비큐 통에서 고구마도 구워 먹고 따듯하고 훈훈하게 공근을 마칠 수 있었다. 우리도 일손을 보태 주말 농장 정리도 해드리고 할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건물도 소소하게 고쳐 드렸다.
할아버지도 근로자들도 서로 고마워했다.
힘든 일도 끝나고 모처럼 한가한 날들이 이어졌다. 근로자들은 일하다보니 하천에 쓰레기가 너무 많았다며 쓰레기 치우기 작업을 제안했다. 자동차 타이어, 요구르트 수레, 농사용 검은 비닐, 골프 가방, 동물 사체 ...별별 쓰레기가 다 나왔다.주민들이 하천을 쓰레기장으로 생각하고 무책임하게 투척한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하천에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 100만원'표어를 붙이고 다녔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하천의 상류쪽에서는 시에서 일년에 6천만원 어치의 EM을 쏟아붇고 있었다. 공장 폐수가 흐르던 하천은 이제 한강의 웅어가 올라와 산란을 하고 있는 터였다. 시민들의 계도가 시급했지만 누가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근로자들은 분통을 떠뜨리고 시의 말단 직원들은 윗선의 지시가 있어야 움직인다며 입을 닫았다.
1여 년의 공근의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따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람 앞에 나서는 걸 무서워하던 내가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고 큰소리도 내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천 바닥의 야생초들처럼 우리도 알 수 없는 힘들이 등 뒤에 버티고 있는 것 같다.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녕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의식의 힘이다.
작고 연약한 풀꽃들이 생태교란 식물에 밀리고 사람의 발에 짓밟히지만 결코 죽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숨을 죽여 자신의 때를 기다린다. 햇빛을 맞이할 때까지! 야생초는 힘이 세다.
일이 끝나가자 근로자들은 다시 바삐 움직인다. 다음 일거리를 찾아서. 누구누구는 정보를 모아 오고 그 사람 둘레에 빠르게 사람들이 모인다. 퇴근 후에 한잔을 약속한다. 개미굴의 개미들처럼 그들은 또 살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