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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Feb 11. 2024

우울이 켜진 밤과 아침 사이의 시간

마음 조각 줍기

연약하고 취약한 마음이라 기민하게 사랑에 반응하고 자주 마음을 앓는다. 그렇게 깨지는 마음들이 있다. 


무수한 조각들에 시선이 길을 잃었던 지난날들 사이, 같은 사무실을 공유하고 있는 지승씨에게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선물로 받았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산산조각은 부서짐으로 균형이 깨진, 불완전해진, 갑작스럽게 길을 잃은, 감정의 풍파를 맞은 모든 사람들에게 초연함을 가져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 속에 체념, 한탄스러움, 초연함, 낙관적, 허무 같은 것들이 보였고, 조각들을 주울 수 있는 용기와 조각난 모습을 인정하며 살자는 강인한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이 있었다. 


담담한 권유이자 위로였다. 


<산산조각>  정호승 시인




우울과 밤을 자주 앓는 사람은 안다. 낮의 우울과 밤의 우울은 깊이가 다르다는 것을. 

'우울이 찾아올 땐 몸을 움직이세요'와 같은 해결책은 대개 낮에만 통한다는 것을. 

세상이 깨어있는 낮에는 소리가 있다. 해가 지듯 소리가 저물면 그 자리에 고요가 짙게 내려앉는다. 

우리를 각자의 심연으로 손쉽게 가라앉힐 수 있는 밤이 그렇게 시작된다. 


우울이 켜진 밤 안에는 꼭 내 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낮의 소음들이 모두 각자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나만 오롯이 남는 느낌. 마음의 소리가 커지고 무수한 생각이 발생되며 밤의 밀도가 짙어진다.

거룩하지 않은 고요하고 거뭇한 밤. 늘 밤이 되면 무력해지는 사람이라 그저 모든 것에 나를 맡긴다. 

생각은 늘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 밤의 시간은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행하지 않았던 선택들을 해보며 가지 않았던 곳을 더듬더듬 나아가본다. 참 무용한 시간이다.

소리와 생각이 들어차면 들어차도록 나를 놓아두고, 일렁이면 일렁이는 대로 파도에 몸을 누이고, 그렇게 까무룩 잠에 빠지거나 하얘진 하늘을 맞이한다. 

소음들이 다시금 들려오며 6평의 고요를 깨면, 그땐 나도 나올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요즘은 아침을 활용하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창 밖이 밝은 푸름으로 변해가면, 때맞춰 새가 고요를 깨트린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로 인한 잔 소음들이 부딪혀 깨지기 시작한다.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차소리, 윗집의 물소리,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의 현관문 닫는 소리. 말소리 없이도 고요가 깨진다. 

세상의 고요가 깨지면 그제야 나도 내 고요를 깨 본다. 침대에서 일어나 부산스럽게 집 소음을 내기 시작한다. 이불을 정리하며 바지락거리는 소리,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는 소리, 컵을 씻는 소리. 창을 열고 바깥의 소리를 키우며 밤새 눅진하게 쌓인 적막과 고요를 깨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를 깨트리고 소리를 담는다.


깨트리며 얻은 조각들을 품에 안으면 조각에 부서지는 빛의 파편들을 선물처럼 쥘 수 있겠지. 

모서리마다 맺히는 찬란한 모습에 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느끼면서.


아침은 정말 그런 힘이 있는 거다. 나를 베는 것에게도 빛을 비추어 아름답게 하는. 

취약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기어코 마음에 사랑을 불어넣어 준다. 

이 밤을 잘 보내라고. 다시 찾아올 우울을 부디 잘 견디라고. 두텁게 쌓인 고요도 빛이 들면 이내 깨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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