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라비 법전과 성경의 대비
5년전 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에 큰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이 때 '모세오경' 중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말씀을 읽으며 율법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모세오경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한 함무라비 법전도 찾아보며, 성경의 율법과 함무라비 법전 사이의 차이를 탐구해보곤 했습니다.
아래의 글을 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최초의 고대 법전이라 불리는 함무라비 법전은 법의 기초를 국가 권위와 인간 상호 간의 질서 유지에 두었다. 계약, 재산, 범죄, 손해배상 등에 대한 다양한 조항들은 철저히 인간 사회 내부의 이해관계 조정을 목표로 하였으며, 그 정당성은 국가 권위의 유지와 사회적 안정이라는 목적에서 도출되었다. 법은 곧 인간과 인간, 국가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제도적 장치였고, 그 본질은 사회적 기능성에 있었다. 반면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행위를 규율한다는 점에서 다른 고대 법전들과 외형상 유사하지만, 그 기준과 정당성의 근거를 전적으로 초월적 권위,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찾는다. 이때 ‘죄’란 단순히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행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이해된다. 이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사회적 효용이나 집단적 합의로 환원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이 대비는 오늘날의 법사상 논의에도 깊은 시사점을 던진다. 현대의 법적 논증은 주로 행위가 미치는 사회적 피해의 정도, 공익 증진 여부, 혹은 효용 극대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정법적·공리주의적 접근만으로는 ‘천부인권’과 같은 개념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만일 법이 전적으로 사회적 합의에서만 성립한다고 본다면, 권리 역시 타인의 승인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그 존재 여부는 국가나 다수의 선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자연법 사상은 인간의 권리와 의무가 사회적 합의 이전에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자연법 사상의 원류는 고대 스토아 철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스토아 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우주적 질서인 로고스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로부터 자연법이 도출된다고 보았다. 중세의 아퀴나스는 이를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인간의 이성이 신의 영원법에 참여함으로써 자연법을 인식한다고 주장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로크는 생명·자유·재산의 권리를 ‘자연상태’에서 부여받은 불가침의 권리로 이해했고, 이는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에도 유효한 권리라 보았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통해, 도덕법칙의 근거를 신앙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자율성에서 도출했다. 현대의 풀러는 ‘내재적 도덕성’을 갖춘 법만이 진정한 법이며, 단순히 절차적으로 제정된 규범일지라도 선험적 도덕성을 상실하면 그것은 법의 이름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실정법학과 자연법학의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하트는 법을 ‘사회적 사실’에 근거한 규칙체계로 정의하며, 법과 도덕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풀러는 법은 내적으로 지켜야 할 도덕적 원리를 필수적으로 수반한다고 반박했다. 예컨대 나치의 부당한 법률을 ‘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법이 결코 권력의 명령이 될 수 없으며 도덕적 정당성을 구비해야 함을 일깨운다. 나아가 풀러는 법의 역할은 권리를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권리를 표명하고 보장하는 것으로서, 법에는 권력에 대한 권리의 선차성이 전제되어야 함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생명윤리 문제에서도 대두된다. 낙태, 성(性), 존엄사, 유전자 조작 등과 같은 사안들은 사회적 합의나 시대적 요구에 따라서만 결정할 수 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생명이 인간의 이해관계 조정이나 법적 다수결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대상이라면, 인간 존엄성의 불가침성은 언제든 침해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생명이 사회적 합의 이전에 존립하는 선험적 가치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법은 이를 함부로 거래하거나 조정할 수 없는 절대적 영역으로서 보호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법 사상이 다시금 주목받는 것이다.
오늘날 법학자들은 자연법 사상을 다시 탐구하고 있다. 이는 곧 선험적인 권리와 가치를 보호하고, 동시에 법의 정당성을 굳건히 세우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율법은 이러한 자연법 사상의 역사적 출발점으로서, 시대와 문화를 넘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중세와 근대의 대표적인 자연법 사상가들인 아퀴나스, 로크, 홉스 등 상당수는 성경을 해석하고 주석하는 과정 속에서 법과 정의의 보편적 기초를 모색하였다. 그들의 논의 속에서 성경은 신앙의 문헌을 넘어,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이해하는 근원적 자료로 기능하였다. 오늘날 생명과 권리의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 속에서도 성경의 율법은 여전히 법의 도덕적 기반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지적 자원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천부적이고 선험적인 가치로 선포하는 생생한 증언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