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합법적 대체 가능성의 법리

by 서운인혜


의료과실에 대한 형사책임을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 '합법적 대체 가능성'의 법리

형법에는 '합법적 대체 가능성'의 법리가 나옵니다. 어떠한 행위자의 과실로 인해 결과가 발생한 상황을 검토할 때, 행위자가 주의의무를 다하는 적법한 행위를 했더라도 결과는 동일하게 발생했을 것이라면, 그 결과를 행위자의 과실에 귀속시킬 수 없다는 법리입니다. 이는 형법상의 책임주의와 무죄 추정의 원칙을 지켜내는 법리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료사건에서 의사의 과실과 책임을 검토할 때 이 법리가 자주 활용됩니다. 실제 대법원 판례와, 이를 바탕으로 쓴 아래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대법원 1990. 12. 11. 선고 90도694 판결 [업무상과실치사]

가. 수술주관의사 또는 마취담당의사가 할로테인을 사용한 전신마취에 의하여 난소종양절제수술을 함에 앞서 혈청의 생화학적 반응에 의한 간기능검사로 환자의 간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아니한 채 개복수술을 시행하여 환자가 급성전격성간염으로 인하여 사망한 경우 위 의사들의 업무상과실 유무(적극)
나. 위 "가"항의 경우에 혈청의 생화학적 반응에 의한 간기능검사를 하지 않거나 이를 확인하지 아니한 의사들의 과실과 수술 후 환자의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거없이 인정하였다고 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한 사례



주문: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부에 환송한다.

판결문의 결론:

혈청에 의한 간기능검사를 시행하지 않거나 이를 확인하지 않은 피고인들의 과실과 피해자의 사망 간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려면 피고인들이 수술 전에 피해자에 대한 간기능검사를 하였더라면 피해자가 사망하지 않았을 것임이 입증되어야 할 것인데도(수술 전에 피해자에 대하여 혈청에 의한 간기능검사를 하였더라면 피해자의 간기능에 이상이 있었다는 검사결과가 나왔으리라는 점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원심은 피해자가 수술당시에 이미 간손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없이 인정함으로써 채증법칙위반 및 인과관계에 관한 법리오해의 위법을 저지른 것이다.



<의료행위는 환자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고도의 위험성을 지닌다. 수술과 전신마취는 환자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나, 그 과정에서 중대한 부작용이나 사망과 같은 불측의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형법은 결과 발생만으로 곧바로 의사의 형사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과실범의 성립을 위해서는 의사가 당시의 의료수준에 비추어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위반하였음이 확인되어야 하고, 나아가 그 위반이 결과 발생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였음이 증명되어야 한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는 난소종양 절제수술을 위하여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수술 담당 의사들은 간기능을 확인하기 위하여 검사를 시행하였으나, 정밀도가 높은 혈청검사가 아닌 정확성이 떨어지는 소변검사에 의존하였다. 그 검사 결과 간기능 이상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신마취제로 할로테인을 사용하였다. 할로테인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지만 드물게 간손상을 유발할 수 있으며, 특히 이미 간질환을 가진 환자의 경우 그 위험이 크게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피해자는 수술 후 고열과 간기능 저하를 보이다가 급성 간부전 및 간성혼수에 이르러 사망하였다.

원심은 피고인들에게 업무상과실치사죄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응급상황이 아님에도 혈청검사 등 종합적인 간기능 검사를 시행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주의의무 위반이며, 이 과실이 사망 결과로 이어졌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와 같은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고인들의 검사 방법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이 피해자의 사망을 초래한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합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수술 당시 이미 간손상을 보유하고 있었는지는 의료기록상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수술 후 수일이 경과한 시점에서 혈액검사 결과 간손상이 발견되었다는 사정만으로, 수술 전부터 간질환이 존재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경험칙에 반한다. 더욱이 사망 직전에 시행된 B형 간염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타난 이상, 가장 빈번한 간질환의 원인마저 배제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수술 전에 정밀검사를 시행했더라면 간손상이 확인되었을 것”이라는 전제는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된다고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면, 설령 피고인들이 정밀검사를 시행하였더라도 피해자의 간손상이 드러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피고인들은 여전히 할로테인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사망이라는 결과는 동일하게 발생하였을 수 있다. 즉, 적법하고 정당한 절차를 다하였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수 있으므로, 피고인들의 과실행위와 피해자의 사망 사이에는 법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 이는 이른바 '합법적 대체행위'의 법리에 해당한다.

대법원은 이와 같은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하였다. 이는 피고인들에게 면책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함이 아니라, 형법의 근본 원칙인 책임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형사책임은 결과 발생만으로 성립하지 아니하며, 과실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는 한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이 판결은 의료과실 사건에서 형사책임을 인정하기 위한 요건을 엄격히 밝히고 있다. 주의의무 위반과 인과관계는 별개의 요소이며, 양자가 모두 입증되어야 책임이 성립한다. 특히 합법적 대체행위의 가능성은 인과관계를 단절시키는 결정적 사유가 된다. 이러한 태도는 형법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책임 없는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의료행위의 특수성과 위험성을 고려하면서도 형법의 일반 원칙을 관철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합법적 대체행위의 법리는 형법의 적용이 언제나 무죄추정의 원칙 위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한다. 입증되지 않은 사실에 기초하여 형사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며, 이는 의료라는 특수한 영역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불가피한 결과를 억지로 특정인의 과실에 귀속시키지 않는 것, 결국 이는 형법의 엄격한 책임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이 교차하여 적용되는 지점으로 보아야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존 브라운의 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