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면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청이 있는 도시의 여자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저는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생회 간부를 했을 만큼 활달했습니다. 그런데 큰 도시의 고등학교에 가서는 촌티 날까 봐 괜스레 주눅 들곤 했지요.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첫 음악 시간이 있던 날, 5층 음악실에서 수업이 있다는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때는학교 건물이 5층인 경우가 흔치 않았지요. 저는 5층 음악실을 하늘에 있는 콘서트홀 정도로 상상하며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리고도시에 있는 학교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내심 뿌듯했습니다. 도시에 있는 학교에 비해 시설이나 환경이 열악한 시골의 중학교에 다녔던 저로서는 음악실, 미술실, 무용실, 과학실, 가사실습실 등이 있는 것도 자부심이 컸지요. 다른 학교로 진학한 친구들에게 우리 학교의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편지를 썼던 기억도 있습니다.
저는친구들과 함께 줄을 지어 1층 교실에서 5층 꼭대기까지 음악실을 찾아 올라갔습니다. 앞선 친구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긴장한 아이들이 조심조심 따라 들어갔지요. 그리고음악실에 들어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다른 아이들 입에서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책에서 보았던 그랜드 피아노가 뚜껑을 연 채 웅장한 자태로 자리잡고 있는 음악실은 정말 아름다웠지요. 그것도 시가지가 멀리까지 다 보이는 5층에 있는 음악실이라니요!
온통 나무로 된 음악실 벽에는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저도 알 만한 음악가들의 사진이 죽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인 줄 알게 되었지만, 멋진 포즈로 지휘봉을 든 지휘자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자리를 찾아서 앉자, 갑자기 음악이 터져 나왔습니다. 엄청나게 큰 소리에 모두들 깜짝 놀랐지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샴푸 광고할 때 나오는 음악이었습니다. 당시는 1970년대 중반으로 우리나라에 액상 샴푸가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지요. 아마 타미나 샴푸와 유니나 샴푸가 제일 유명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리고, 이런 광고였던 것 같아요.
"딴 딴 딴 따~~~ 안 (샴푸~), 딴 딴 딴 따~~~~ 안 (샴푸~)"
저는 제 짝꿍과 함께 음악에 맞추어 샴푸 광고 카피를 따라 하면서 까르륵까르륵 웃었지요. 이윽고, 음악이 끝나자, 무대 옆에 있는 작은 문을 열리고 반곱슬머리의 남자 선생님이 나왔습니다.
"너, 너, 일어나!"
음악 선생님의 가느다란 지휘봉이 정확히 저와 제 짝꿍을 가리켰습니다. 저희는 영문도 모른 채 일어섰지요.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지만요.
"이 위대한 음악을 들으면서 웃고 떠드는 무식한 두 소녀, 베토벤 선생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아무튼 위대하신 베선생님이 이 자리에 안 계시는 것을 다행인 줄 알아라. 그런데 왜 웃었던 거야?"
음악 선생님은 지휘봉을 까딱거리며 리듬에 맞추어 한 음절씩 스타카토로 물었습니다. 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샴푸 광고에 나오는 음악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지요.
"그래? 너희가 무슨 죄냐? 이 불멸의 음악을 샴푸 광고 따위에다 쓰는 게 문제지. 무식한 두 소녀, 자리에 앉아."
제가 [운명 교향곡] 때문에 무식한 소녀가 되었던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제가 운명 교향곡을 듣고도 알지 못해서 샴푸 광고를 따라 했지만,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때 읽었던 위인전집에서 『악성 베에토벤』이라는 어려운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지요. 귀머거리 작곡가, 악성(樂聖), 그리고 [월광 소나타]에 얽힌 눈먼 소녀와의 에피소드, 많은 교향곡을 작곡한 것 등이 실린 베토벤의 일대기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음악 시간에 있었던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1악장>의 감상은 샴푸 광고를 먼저 떠올리는 바람에 우스꽝스럽게 되어 버렸지요. 그렇지만, 저로서는 운명 교향곡을 처음으로 제대로 들은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제가 운명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미소를 짓게 된 추억의 장면이지요.
또 음악 선생님은 당시 노총각이었습니다. 그 이유만으로도 우리들은 음악 시간이 되면 거울 앞에 서서 목소리와매무새를 가다듬었고, 5층까지 오르는 계단을 날았으며, 음악 수업에 집중할 이유가 되었지요. 그리고, 음악 선생님은 3년 내내 수업 시작 전에는 매주 다른 음악을 준비하여 들려주었습니다. 감상 음악에 대한 정보를 칠판 왼쪽에 간략하게 적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지요. 그리고 고등학교 3년 내내 음악 감상의 내공이 쌓여 오늘날까지 제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을 수 있는 바탕이 된 셈이지요.
사실, 저는 중학교 때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감상곡조차 실제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첫 음악 시간에 성능 좋은 음향 기기를 통해서 처음으로 운명 교향곡을 듣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제 개인사적으로는, 클래식 음악에 귀가 열린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대중적인 음악 방송 KBS FM1에 채널을 고정하고 듣습니다. 제가 일하는 시간이나 휴식 시간에도 배경 음악으로, 또는 백색소음으로 듣고 있지요.
몇 년 전, 유럽 여행 중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음악당>에서 열린 [신년음악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비엔나의 신년음악회는 아니었지만, 제가 받은 감명만큼은 빈 필하모닉에 견줄 만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저도 언젠가는 빈 필의 신년음악회에 꼭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또 런던 여행 때는 피카딜리 서커스에 있는 <허 마제스티 시어터(Her Majesty's Theatre London)>에서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했지요. 오페라의 유령은 국내 배우들의 공연도 좋았지만, 10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극장의 아름다운 무대에서 현지 극장의 배우들이 뿜어내는 감동적인 공연은 아직까지 제 가슴에 짜릿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음악을 평생 즐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준 제 모교의 훌륭한 교육과정과 음악 선생님께 감사하며, 제 귀가 들을 수 있는 그날까지 음악을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생애에 이토록 강렬하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교육, 또 그런 교육을 실천하는 학교와 선생님이 많아지기를 바라면서요. [전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