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사용 설명서
우리 학교에서는 새 학년이 시작되는 봄과, 2학기가 시작되는 가을에 교육과정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먼저 교직원을 대상으로 하여 공유하고, 이를 수정 보완하여 다음에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했습니다. 이때, 여러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님을 위해 학년별로 날짜가 겹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교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 설명회 때는, 학년에 소속되지 않은 교직원들도 부서별 또는 개인별로 사용설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했습니다. 저도 당연히 <교장 사용 설명서>를 준비했지요.
흔히 ‘사용 설명서’는 기계나 기기, 소프트웨어 등의 기능이나 사용법을 설명한 글을 말합니다. 제 경우에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휴대폰, 화장품, 약품, 가전제품 등을 샀을 때 들어 있는 사용설명서가 있었습니다. 교실에서는 <나 사용 설명서> 또는 <모둠 사용 설명서> 등으로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학기초에 수업에서 많이 활용하는 콘텐츠입니다.
[전우주 교장 사용 설명서]
* 잘하는 것: 수업, 요리, 동화 구연, 노래, 경청, 걷기
* 못하는 것: 달리기, 그림 그리기, 다이어트
* 좋아하는 것: 꽃, 클래식 음악, 맛있는 음식, 책
* 싫어하는 것: 화냄, 거짓말, 게으름, 무질서, 무책임, 무례함
* 하고 싶은 일: 텃밭 가꾸기, 여행, 자전거 라이딩
* 하고 싶은 말: "여러분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기타: 24시간 중 아무 때나 출근 가능(204동 거주)
*** 위의 내용과 그밖의 것들이 궁금하신 분은 교장실에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교장 사용 설명서]라니, 참 생소하지요? [교장 사용 설명서]는, 교장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니, 잘 알아 두었다가 필요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사용하라는 일종의 자기소개서 또는 자기광고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 후, 이 [교장 사용 설명서] 덕분에 저는 매우 바쁜 교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학년별로 교육과정에서 요구하는 주제를 수업해야 했고, 입학식 등 행사에서 동화 구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교직원들이 하는 수많은 회의에 참석해서 회의 내용을 경청해야 했지요. 그리고, 담임선생님이 손들어 버린 말썽꾸러기들과 함께 한강변을 달리는 힘겨운 주말 자전거 라이딩에 동행해야 했습니다. 또 저녁 시간에는 학부모들과 함께 하는 반모임에 참석하고, 아버지회 모임과 가족운동회에도 함께 했습니다.
2,000명 분의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규모의 큰 학교 교장으로서 교장실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장실을 나와서 교실, 연구실, 특별교실, 보건실, 급식실, 옥상, 운동장, 체육관, 울타리 등 학교 안팎을 누비며, 아이들, 선생님, 교직원, 학부모와 함께할 때, 교장으로서의 또 다른 학교경영 아이디어를 얻음과 동시에 그 무게감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무게감은 교장으로서의 직무 능력과 리더십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지요.
저와 같은 <교장 사용 설명서>가 아니더라도, 학교구성원들이 요구하는 교장의 모습을 잘 알아채고 수용하여, 교육공동체로서 함께하면서 공동체성을 굳건하게 다지고, 아이들과 학교를 중심에 두고 함께 바라보면서 고민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교장이 학교 경영의 큰 그림을 그리며, 교사상(敎師像), 학생상(學生像), 학부모상(學父母像) 구상하여 요구할 수 있듯이, 다른 학교 구성원들도 그들이 그리는 교장상(校長像)을 요구할 수 있는 학교 문화를 갖는다면, 학교 안에서 아이들은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