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내가 읽었던 책
18살,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융합캠프"라는 것을 진행했다. 문과와 이과의 경계를 허물고 문이과를 융합하는 인재가 진짜 인재라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 만들어진 캠프였다. 일주일 간 야자시간을 모두 할애해서 하나의 책을 가지고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적 토론 등을 담당 선생님들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선정된 책이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10년도 전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그었던 줄은 아마 지금 밑줄 친 부분과는 많이 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본가에 가면 이 책이 있겠지만 표지가 바뀌어 출간된 책을 보며 소장용으로 샀다. 이 책이 극본화 되어 "파반느"라는 영화가 나왔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반골기질인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지도,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
10년 전 기억에 의지해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외모에 관한 이야기' 였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특이한 띄어쓰기와 (새로 출간된 책에는 색이 전부 빠져있었지만) 인물의 대사들이 다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구조였기 때문에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책을 읽고 난 지금. 이 책을 과연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외모에 관한 이야기도 분명 있으나, 그것은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주인공처럼 '아니, 아니에요'를 되뇌게 된다. 주인공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꺼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얼마 전 브런치에 올린 글에 '세상과 매체가 경제를 좇으라 한다'라고 썼고, 그 뒤에 한 줄을 더 썼었다. 매체가 아름다움을 좇으라 한다고. 글의 맥락과 맞지 않아 과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 줄을 지웠었다. 이제 그 내용을 풀어놓을 때가 된 것 같다.
"삶"이 아니라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나로서는 이 책에 무한한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삶"을 살았던 시기가 있었으나 그리 길진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었던 때와도 겹친다고 생각한다.
10년도 더 된 책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과 인간은 바뀌지 않았다 생각한다. 어느 페이지의 문장처럼 "그래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래도 그렇게는 살지 않는 사람들... 그래도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얘기 속에서... " 나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의 마음으로 누군가가 반짝일 수 있게 빛을 내어주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것은 꼭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저 필라멘트와 같아. 어떤 미인도 말이야... 그게 꺼지면 끝장이야. 누구에게라도 사랑을 받는 인간과 못 받는 인간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만큼이나 커.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라는 문장을 읽으며 나라는 인간은 사랑받으면서도 왜 고장 나기 직전의 전구처럼 필라멘트가 아슬 거릴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깨달았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필요가 없는 거였다. 나를 존재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사랑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게 필요한 거였다.
주인공의 외모가 19살 때와 35살 때 변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나이 들어서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의 사랑만 쳐다보고 있는 필라멘트들이 없는 곳. 그리고 나 자신의 필라멘트를 밝힐 수 있게 된 것. 두 가지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성수에 가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징그럽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아니라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분명 필라멘트들이다. 그리고 그 필라멘트사이에서 아슬하지 않은 전구인 척했던 나 자신이 우스워진다.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팝업스토어를 돌아다니며 줄을 서서 구경하고, 공짜 가챠를 뽑고 그런 행동을 했던 지난주의 내가 한없이 우스워진다.
이건 분명 삶이 아닌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