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한강]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by 해마

생생한 영상이나 사진보다 글이 더 잔인할 수 있구나. 더 쓰고 비릴 수가 있구나.


얇으니까 몰입하면 하루면 읽겠다 생각했는데, 종이 한 장을 넘기기가 이토록 무거울 줄이야. 책 옆면에 다닥다닥 붙은 핑크색 포스트잇들을 붙이는 것을 100페이지 언저리부터 포기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모든 구절이 내 눈을 끈질기게 붙잡아서, 대체 어디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어떻게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가야 할지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책을 읽으며 감정이 동요되어서 힘든 적은 처음이다. 문장을 곱씹고 곱씹고 이제 삼키려고 해도 입 안이 바짝 말라서 삼킬 수 있는 문장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른다는 건 이런 거구나. 입이 쓰다는 것도 이런 거구나. 가랑비에 옷 젖듯 하루에 몇 장씩만 읽었는데도 소화가 안 되는 거다.


동생은 소년들이 청사 안에서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고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는 결혼도 안 했고 아기도 없는데 이상하게 동호 엄마의 이야기가 그렇게 읽기 힘들었다. 내가 그때 널 끌고 왔다면 넌 살았을까. 네가 죽는 것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노릇이지만, 너의 신념을 지켜주는 것이 맞을까. 장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현실을 모른다고 타박해야 할까.


내 가족이. 이를테면 내 동생이 청사 안에서 버티고 서있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청사 안에 있어줘야 할까. 아니, 그럼 남은 엄마는, 아빠는. 그럼 동생을 끌고 와야 할까? 아니면 동생을 보내고 내가 대신 있어야 할까? 막상 그 무도한 폭력 앞에 덩그러니 놓이게 된다면 그저 속절없이 벌벌 떨며 나만 아니길 바라며 숨게 될까…


지금 평범한 삶을 사는 평범한 나는 모른다. 내가 어떻게 할지. 내 옆의 누군가가 어떻게 할지.


203p “그 시절, 머리를 깎고 교복을 입은 소년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순한 외꺼풀 눈은. 키가 크느라 야윈 볼과 기름한 목은.”


그저 평범한 소년, 소녀들의 피를 끓게 만들고 끝끝내 뜨거운 피를 뿜게 한 것은, 누구인가.

오직 한 사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나.


절묘하게 시기가 맞아떨어져 그 때 읽게 된 이 책은, 소년이 지금, 여기, 와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수없이 흘린 피들이 고요한 땅 아래서 뜨겁게 흐르고 있었던 걸까?그래서 평화가 깨어진 그 순간에, 피들이 온 나라에 살아 스며들었던 걸까.


과거와 동일한 일을 막기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였다. 오직 몇 사람이 폭력을 시도해도 더 더 더 많은 사람이 스며든 피를 기억하고, 또 땅을 타고 끓어올라온 피를 느끼고, 결국 끝은 달라졌으니까.


날이 너무 추워서 요 근래 우리 집 근처 의원 사무실 앞에 혼자 앉아 투표를 촉구하는 청년에게 따뜻한 차와 핫팩을 주러 간 날. 또, 유독 그 청년이 외로워 보여 책을 챙겨 옆에 앉으려고 간 그날도 그 청년이 앉은자리에 뜨거운 피가 느껴졌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폭력의 시대를 피부로 느낀 세대는 마치 갑옷을 입은 양, 피가 스며들지 않은 것 같았다.

4차로를 사이에 두고 이 쪽과 저 쪽이 소리치며 걷던 날, 동생에게 내가 늙어서 저렇게 되면 꼭 말해달라고 당부했다.


사는 동안 많은 것을 겪어내느라 피부가 무뎌지고 생각도 굳어지고 마음까지 껍데기로 덮여도.

그래도, 폭력 앞에선 지금과 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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