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슈슈의 모든 것-이와이슌지]

책은 아니지만 도피.

by 해마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보다 더 잔인한 영화를 많이 본 것 같은데, 이 영화만큼 기억에 남는 영화가 없다. 칼로 베고 총으로 쏘고 아킬레스건을 끊는 것보다 이 영화가 더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딱히 인생영화를 꼽지 못하던 내게 인생영화가 생긴 것 같다.


영화는 15세 이상 관람불가 영화였는데, 내 생각엔 19세 이상 관람불가다. 아주 작은 희망까지 짓밟아버리는 이 내용을 과연 19세 미만이 봐도 될지.


스토리에 녹아있는 비극이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점이 가장 큰 비극이다. 단순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불행들이 비극적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각 주인공이 불행을 잠시 내려놓았던 스팟이 없어지는 것이 마음 아프다.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모두 청소년이지만, 청소년에 국한된 스토리라는 생각 또한 들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시각을 비틀면 이해가 가는 인물들.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의 삶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필수악을 등장시키는 여느 영화와 달리 영화가 억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영상미와 함께 음악 역시 내용과 대비를 이루며 자꾸 뇌를 맴돈다. 특히, Ai no Jikken와 Glide라는 제목을 가진 두 ost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영화의 곳곳에 담긴 의미를 나 혼자 곱씹어 보는데,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어느 인물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냄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고리를 끊어내고, 어떤 인물은 타인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자기 자신 속의 불행을 타인에게 옮겨 심어보려 한다. 결국 비극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쪽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 쪽이다. 자신의 불행은 자신만이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인지.


또 곱씹게 되는 지점은,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릴리슈슈 팬카페에서의 활동들.


인물들의 팬카페에서의 모습과 현실에서의 모습이 교차되며 보인다. 팬카페에서의 자아가 진짜인지 현실의 모습이 진짜인지 모르겠으나, 진짜라고 믿는 것이 진짜가 아닐 때 얼마나 절망적 일지 상상해 본다.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극명하게 다르면서 또 비슷한 인물들을 보며, 나와 비슷한 방식을 선택하는 인물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가장 나약한.


그 인물이 원하는 것도, 웃는 순간도 공감이 간다.


어쩌면, 가장 강한 인물은 한없이 약했던 ‘필리아’가 아닐지.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숨 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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