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가

정신의학과 진료일지

by 해마

이제 정말 진료일지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나아질 듯 나아지지 않는 내가 지겹다.

사는것도 지겹고

살기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것도 지겹고

화분을 가꾸듯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조금씩 관심의 물줄기를 줘야 하는 것도 지겹다.


긴 추석 연휴동안 집에 내려가지 않고 쉬었다.

M의 집에서, 그리고 우리집에서 먹고 자고만 반복했다.

살이 찌는 건 금방이다.


바람이 차가워지면 마음에 뚫린 구멍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공허함은 어디에서 온걸까.


이제 선생님은 더이상 나의 어떤 이슈들에 대해 묻지 않으신다.

나 역시 딱히 할 말이 없다.

자꾸 무언가를 해보라는 말만 반복하시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나는 "지겨워요."만 반복한다.


매년 시험은 가을~초겨울 사이에 있었다.

일년을 달리던 내게 시험 이후의 기간은

해방이라기보단 공허한 시간이었나보다.


좀 더 미리 열심히 할 걸, 좀 더 해볼걸

좀 더, 좀 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생각이 삐져나오면

재빨리 생각으로부터 도망쳤다.


어떤 해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었고

어떤 해에는 집에 내려가 쳐박혀있었던 때도 있었다.

어떤 해에는 바로 다음 시험을 준비했으며

어떤 해에는 바로 알바를 했다.


비슷하게 흘러간 해는 없었으나 이제 생각해보니

바쁘게 움직인 이유는 하나였다.

가만히 앉아서 결과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서.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던 거다.


학창시절 나는 '뭐든 꽤나 잘 하는 아이'로 통했다.

공부도, 운동도, 음악도 미술도 학교에서 바라는 기준은 항상 가뿐히 넘었다.

내게 그 기준들은 큰 힘 들이지 않아도 넘을 수 있는 정도였다.


어른들의 경쟁속에서 나는 '잘하는 게 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함께 경쟁하던 사람들처럼 끈질기지도, 독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았다.

큰 힘 들이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뛰어넘을만큼 천재적인 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견고할 줄 알았던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진 것을 체감하는 요즘,

이빠진 틈새들이 시렵다.


아네모이를 동경할 만큼 바람을 좋아하지만

요즘은 바람이 너무 생생히 느껴져서 무섭다.

내 몸이 젠가라도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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