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과 진료일지
의도치 않게
(아니, 의도적이었나)
두 번의 진료를 뛰어넘었다.
가지 않으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진료를 가야 하는 날, 그 시간에
허튼짓을 하며 뽈뽈 돌아다녔다.
약은 점점 떨어졌고 마지막 며칠은 아예 약 없이 지냈다.
약이 큰 효과가 있나? 싶은 나날들이었으나
약 없이 며칠을 지내고 나니
약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겠다.
그 사이에 L과 불꽃놀이를 보러 다녀왔다.
L의 직장 동료도 함께.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나를 생각해 주는 L의 마음이 따뜻해서
오케이 했다.
L의 직장 동료는_이하 ‘나나’라고 칭하겠음_ 밝고, 건강하고 야무진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필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
나나는 L의 말에 답하는 모든 말이 긍정적이었다. 장난도 긍정적으로 받아쳐주었고, 모든 대답이 그랬다.
L의 말에 장난치는 나의 말과는 모든 것이 반대였다. 그게 순간순간 부끄러워져 말을 사리게 되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나나의 옆에서 나의 모난 부분만 보였다.
약의 부재 때문인지, L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욕심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 좋은 시간 대부분을 나는 자책으로 물들였다.
오랜만에 밖에서 뒹굴거리며 책도 읽고 노래도 듣고 있으니 좋긴 했다.
날 꺼내준 L에게 고마웠다. 집에 가는 길에 L이 “나나 편하지?”라는 물음에 편했다고 대답했으면 L의 마음이 좀 더 편했을 텐데.
나는 L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집 가는 길 L에게 오늘 느낀 감정을 투정처럼 늘어놓으며 눈물을 질질 짰다.
L에게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후회가 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나의 추한 모습까지 매번 보이게 되는 것이 싫을 뿐.
이 모든 것을 진료시간에 이야기했다.
두 번의 약속을 펑크 낸 것이 죄송할 따름이었다.
선생님은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고 했다.
그저 이 우울에 잠식되고 있는 내가 빠져나오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중요치 않다는 말이 작은 위로가 되었다.
추석에 집에 내려가지 않고 혼자 지낼 예정이라고 하니, 많이 걱정하시는 듯하다.
나 역시 더 안 좋아질까 봐 조금 무섭지만 마음이 편할 것은 오백프로 장담할 수 있다.
선생님은 추석에 혼자 지내는 대신 무언가를 정해놓고 하라고 하셨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또, 가족에게 연락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오롯이 혼자이고 싶었다.
내가, 내 삶인데 왜 내 맘대로 못하냐고 물으니
선생님은 나를 혼내셨다.
혼자 사는 게 아니니 그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고 하신다.
내 맘대로 하기 위해 감내해야 할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내 몸 하나 혼자 두겠다는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