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음 Nov 17. 2023

아들 길들이기2-대화가 통하는 스윗가이로 만들기

짧게 흘려라, 상처받지 말아라, 알려줘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 는 무슨 개뿔. ‘별다른 말 없이 선물만으로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다?’ 물론 아니다. 이는 초코파이를 많이 팔기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 만약 달콤한 무언가가 마음을 담은 손편지나 메모에 달려 온 옵션이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당연히 50%이상 부족하다. 천선란 작가의 소설, ‘천개의 파랑’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책 속 정확한 워딩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요?’ 라고. 사람과는 다른 눈치 제로인 인공지능의 말로 치부해 버리려는가? 그러기에는 메시지의 울림이 너무도 크다.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 나의 두 아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이미 남편을 그렇게 변화시키고 싶었지만 ‘좌절->도전->실패’의 무한 반복을 거친 후 현재는 거의 포기상태이다. 물론 아들 역시 아빠를 닮았을테지만 아빠보다는 훨씬 말랑말랑하리라 믿고 있다. 남편이 이미 제작 완료되어 모양이나 용도를 바꿀 수 없는 도자기라면 아들은 계속 빚어지고 있는 중이므로 가변성이 높다. 엄마의 감정변화를 살피고 친근한 말동무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스윗한 아들로 변모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아직은 사회적 기술도, 의사소통 능력도 다소 부족한 뚝뚝한 아들이지만 말이다. 아들에게 ‘말로 잘 표현하기’를 가르치려 계속 노력하고 있다. 교육의 효과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으므로 당분간 엄마의 클래스는 쭈욱~지속될 예정이다.      




내가 자주 쓰는 방법으로 특별한 것은 전혀 없다. 또한 매우 간단하다. 그래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아들맘들에게 도움이 될까하는 바람에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 알리고 싶은 정보나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짧게 흘린다.     


아들에게 툭툭 던지는 말들을 예로 들자면 이런 것들이 있다. ‘모레 엄마 생일이야’, ‘네가 어버이날에 맛있는 커피를 사다 주면 좋겠어’, ‘엄마는 아들이랑 산책하는 사람 보면 부럽더라’ 등등. 전혀 별게 없지만 꽤 효과가 있다. 무심, 시크한 아들로 하여금 이런 문자를 보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달콤한 문자에 마냥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변은 이러했다. 엄마가 언젠가 호수공원 음악분수를 같이 보고 싶다고 말했었다고. 정작 그 말을 한 나 자신은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 말이 공중 분해되지 않고 아들 뇌 속에 무심코 박혔다는 것이다. 가끔은 흔적없이 잠들어 있던 내 말이나 마음이 녹아버리지 않고 이렇듯 멋진 표현으로 재탄생될 수도 있다.


둘째, 무반응에 익숙해지고 상처받지 않는다.     


사회적 기술이 부족한 아들이라면, 요즘 유행하는 mbti의 T인 경우라면 더욱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화를 돋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서운해하거나 이로 인해 언쟁하는 불상사를 만들지 않는다. 아들은, 아니 쟤는 원래 그러려니 그저 받아들인다. 그리고 차분히 다음 단계로 진행하면 된다.      


셋째, 원하는 반응 혹은 모범 대답을 알려준다.     


모르거나 표현을 못 하니 어쩌랴. 대놓고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큰아들 같은 경우는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도 말 한마디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 그저 ‘아들! 엄마 아픈 것 알았어?’ 혹은 ‘엄마 아플 때는 어디 아프세요라고 물어봐줘’ 이런 식으로 담백하게 말한다.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는 상황이나 따뜻한 말을 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에서도 역시 무반응일 수 있다. 이미 말했듯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리거나 서운해하지 말아라. 그냥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다. ‘엄마 속상한데 네가 힘내라고 말해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 라고.




삶은 배움의 연속이라더니 진짜 맞는 말이다. 물론 이 배움이라는 것이 지식이나 정보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회적 관계 맺기나 대화의 기술 습득도 앎과 연습이 필요하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메마른 삶에 윤기를 더해줄 수 있기에 훨씬 중요하리라. 아들을 향한 나의 이런 바람과 노력들이 제풀에 꺾이거나 흐지부지 사그라들지 않기 바란다. ‘우리 아들이 달라졌어요’를 여러 편 찍을 수 있기를 바라고 기대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들 길들이기-설거지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