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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 Jun 07. 2024

'왜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러는 거야'

20대에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


미쳤다고 해도 좋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보다도 두 배의 나이를 먹었을 나이 든 지인이 눈물을 훔치며 ‘어머니가 위독하셔서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어느덧 7년이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취직을 했고, 새로운 꿈을 찾았고, 아버지는 크게 아팠다. 그 과정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사실상 없었다.

인복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고, 남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 성격의 탓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쑥, 세상에는 여러 감춰져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사람이 아니라,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잃은 사람들도 아니라. 가엾지만 ‘이제는 그 젊음으로 아픔을 이겨내고 홀로서기를 해야지’라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은 손주를 부모님이 돌봐주니 어쩌니로 다투고 있는 와중 기댈 곳 없이 혼자가 된 사람들. 어쩌면, 아버지라도 남아있는 나보다도 훨씬 더 외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어중간하고 애매하다고 생각했던 내 지난 날들을 지금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프다.

너무 일찍 간 부모님의 존재가 우리의 인생을,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필자는 자기검열이 심한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소위 ‘자기애’도 낮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단하고 사회의 틀에 맞추려는 사람이다.

그렇게 7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치열하게 나 자신을 관찰하고 틀에 빗댄 결과, 아무리 그런 나라도 부모를 잃은 슬픔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내가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너무 나약한 것이 아니라고.

그 이야기를, 닿을지 그렇지 않을 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를 괴롭게 했던 것은 후회였다.

어머니는 병원에 계시다 ‘도저히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퇴원하신 후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그 날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돌아가시기 직전 혼수상태인 어머니를 붙들고 나는 ‘엄마, 엄마’하며 엉엉 울었는데, 그 때 오셨던 호스피스 간호사 선생님의 따끔한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따님이 그러시면 환자는 아, 나한테 정말 큰일이 났나보다라고 생각해요. 울지 마시고 의연하게 계세요. 별것 아닌 것처럼 계세요.’

선생님의 말은 십분 이해가 갔지만 나는 그때 대학교를 갓 졸업한 20대 초반이었고, 그 정도의 감정 컨트롤을 할 수 있는 연륜에 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겁을 주고 싶지 않아서 울면서도 필사적으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던 것이 떠오른다.


결국 그 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망자를 앞에 두고 산 사람이 하는 후회라야 다들 비슷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 가보시라고 할 걸.’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내 말을 잘 안 들을 걸 알아도.

‘더 오래 곁에 있어드릴걸.’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내가 집에 오는 걸 어머니가 싫어하셨어도.

‘마지막 가시는 길에, 사랑한다고 말해드릴걸.’

이건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하지만 누구나 상황은 같지 않고, 다른 이는 모르는 비밀과 같은 죄책감이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나의 경우는 ‘물’이었다.

아프시던 어머니가 목이 마르다고 하실 때는 내가 물을 가져다드렸는데, 어느 날 물통을 보니 몹시 퀴퀴한 냄새가 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때가 8월이었고, 장소는 강원도였지만 어쨌든 한여름이었다.

왜인지 물통을 상온에 두었었던 것 같고, 그 물을 몇 잔인가 어머니를 가져다 드렸던 것이다.

그 기억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년 이상 나를 괴롭혔다.

마치 내가 어머니를 죽인 것처럼, 어머니에게 가져다드렸던 그 물이 어머니의 체내를 돌고 돌아 결국 목숨을 앗아간 것처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상온에 몇 시간 이상 둔 물은 절대 마시지 않는다.

우습게도.

어머니에게는 드렸으면서.     


이성적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에 내 퀴퀴한 물 한두 잔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애써 결론지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라는 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몇 년 동안이나.     


     

후회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어머니는 투병을 꽤 오래하셨고, 상태가 괜찮았던 때에는 나의 방문을 극도로 꺼려하셨다.

아파서 홀쭉 마른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 때의 나의 마음은 어땠을까?

취직과 가족의 투병,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타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우울한 20대였던 필자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놀랍게도 ‘안도’였다.

그 슬픈 자리에 내가 없어도 된다는 사실.

이 고난과 역경은 아직은 어머니와 아버지 둘이서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것.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더더욱 나이만 먹었지 어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의 상황이 악화되자, 무엇을 직감하셨는지 어머니는 자신을 보러 오지 않는 나를 힐난하였다.

그 때에 내 마음은 어땠을까?

바로 ‘귀찮음’이었다.

엄마가 나한테 왜 이러지?

나한테 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빠랑 둘이서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왜 나보고 자꾸 오라고 하는 거야.   

  

내가 불효녀라서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

혹은 철이 없어서 그랬을까?

둘다 맞을 수도 있지만, 가장 큰 마음은 ‘도망치고 싶다’였다.

나는 그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누가 봐도 좋지 않은 결과를 향해 굴러가는 현상을 보면서 나는 그것을 감당해내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억울함도 있었다.

그러니까 병원에 진작에 가라고 했잖아.

왜 내 이야기는 안 듣고, 내가 집에 가서 엄마 얼굴 보고 싶다고 할 때는 오지 말라고 그렇게 하더니 왜 이제 와서.

이런 어린 애 같은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물론 나보다 어린 나이에도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망치지 않고 그 상황을 견디는 사람들도 있고, 비슷한 상황에 서 본 적이 있는 나는 그들을 굉장히 존경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시 내 마음 깊숙한 곳을 털어놓자면 그랬다.

손가락질을 받아도 상관없지만, 나는 이것이 나만이 느낀 감정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나는 아직 미성숙했고 그런 미성숙한 인간이 얼마든지 느낄 수 있었던 감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너무 소중히 키워온 탓에 나잇값을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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