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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Aug 17. 2024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전부는 아니니까

병가 그 이후의 삶

복직을 앞둔 7월 어느날,

나는 나 대신 온 기간제 선생님께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학교에 갔다.

작년 한해, 학부모의 고소와 악성민원과 관리자의 보신주의적 태도, 일부 동료교사의 바늘같은 말들로 보이지 않는 피범벅이 되었던 나는 병가를 결정했다.

신경정신과에 다니고 불안과 우울증에 대한

약도 복용했다.

공무상병가를 신청했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 세 달 이상이 걸렸다.

나의 경우는 빠른 편이었다.

공적인 일로 인해 병에 걸렸다는 것이 명백했다.

증거나 자료는 차고 넘쳤다.

가해자는 있었지만 책임지거나 사과하는 사람은 없었고, 피범벅이 된 나만 남았다.

나를 돌보는 것이 먼저였다.

담임학급학생들이 눈에 밟혀 버티길 수개월.

11월  나는 병가를 냈고

이듬해 1월 공무상 병가 승인이 났고

3월 공무상 병가 연장승인이 났다.

그간에 흘린 피를 닦고 연고를 바르느라 수개월이 걸렸다. 약을 먹지 않으면 심장이 요동치고 신경과민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약을 끊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있었고

5월쯤 약을 끊었다.

드디어 운동화 끈을 조일 수 있게 됐다.

첫날, 집주변 산책로를 걷는데 3키로도 못가 우울감이 몰려왔다.

우리동네 산책로는 꽃밭인데, 너무 아름다운데.

퇴색된 색으로만 보이는 건 나뿐인듯,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은 즐겁게만 보였다.

6월쯤 드디어 평소 산책코스를 완주할 수 있었다. 약 8키로 정도의 왕복 거리였고,

나는 울었다. (이건 감격이었다)

너무 쉬운 이 일이 10개월이 넘게 걸렸다.

해냈다.

자신감과 기쁨이 아주 오랜만에 솟아났다.

며칠 뒤 교감, 교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2학기에는 복직하겠습니다."

잘됐다는 답장에도 나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고맙지도 않다.

털끝하나 다치기 싫은 마음으로 내 잘못이라고 외치던 그들의 입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부당함을 모른척 외면했던 그들의 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깊고도 깊어서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되었을 때 진짜가 튀어나온다.

작년, 나는 그들의 진짜를 본 셈이다.


인수인계 전 교장을 만났다.

특유의 하이톤과 과장된 몸짓은 변함이 없다.

1학기 학교 이야기와 교권보호를 위해 자신이 했던 '업적'을 이야기하며 '좋은교장코스프레'를 하는 걸,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들어줬다.

어른이라는 것, 그것 하나로 유지할 수 있는 예의의 최대치였다.

오히려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주던 기간제 선생님의 담백함이 좋았다.

나의 사연을 대충 들었을텐데도 감정의 넘침이 없이 예의바르고 배려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이상하리만치 아무렇지 않았고 걱정도 안됐다. 역시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는 거였다.


나는 약을 끊었지만, 완쾌된걸까?

우울과 불안증을 정복한 걸까?

아니다.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지도 모르는, 아니 외면하는 가해자들이 있는 그 곳으로 나를 던진다.

약을 먹지 않고, 그들을 똑바로 대면하며

내 생각을 분명히 전달하고도,

또 비난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는 나를 보기 위에 나를 이곳에 던진다.

그리고 안다.

무너지지 않는 나를 기어코 보더라도

그게 우울과 불안을 정복한건 아니라는 걸.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나는 그저 산산조각 난 내 삶을 갖고 살아가는 것 뿐이라는 걸.

그런 나도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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