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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Feb 18. 2024

열정의 ‘가방’ 끈기의 ‘가지’

문해력향상 교육의 꿈

“여기는 여행으로도 절대,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떠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던 곳. 그런 다짐과 금기를 스스로 어기고 어느 날 훌쩍 그곳을 찾았다.

소중한 기억도, 웃음도 많은 학교였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살게 했던 섬! 한편으로는 나를 성장시켰고 한 편으로는 고생시켰던 섬! 그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누군가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 궁금한 마음이 예전의 다짐을 잊게 했었던 것 같다.     

그 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40여 분 배를 타야 다. 내 근무 당시의 소요 시간은 그랬었다. 싫었던 기억에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덮여 다시 찾았던 그날은 얼마나 걸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배에서 놀라운 일이 생겨서 시간 따위는 셈해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선착장에 가기 전까지는 궁금한 게 많았는데 말이다. 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시간은 얼마나 단축되었는지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은 선착장에 도착해서 차를 배에 싣는 때 찾아왔다. 옛날 생각을 하며 주변을 살펴보다가  어느 순간 굳은 듯 멈추었다. 매표소 한쪽의 어떤 이를 향해 실례가 될 정도로 자꾸만 눈길을 주었다. 차를 모두 싣고 나자 너나없이 바쁘게 선실을 향해 람들이 휩쓸려 들어갔다. 행여나 그 사람을 놓칠까 봐 눈을 떼지 못하며 따라갔다.

배는 아직도 의자나 예약석이 따로 없이 넓은 방처럼 생긴 선실에 뒤섞여 머물다 내리는 방식이었다.

선실 안에서 남편이 말하기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 학생이 맞는 것 같으면 가서 물어보고 이야기 나누어 보라 했다. 마침내 용기를 냈다.

“학생, 실례되는 건 아는데 혹시 ○○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다니지 않았어요?”

학생은 어리둥절해했다. 나를 보고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길래 내가 다시

“나, 이상한 사람 아니고, 학생이 1학년이었을 때 내가 담임이었던 것 같은데 반가워서요. 이름이 ○○○맞아요?”

했다. 참 주책맞은 행동이었지만 반가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남편 말대로 묻지 않고 헤어지면 앞으로 내내 오늘 일을 후회할 것 같았다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가 나왔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 나를 기억해 냈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했으니 10년 만에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K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던 짧은 커트 머리의 조그마한 여학생이었다. 부모님이 도시에 돈 벌러 가면서 할아버지 댁에 맡겨 놓은 지 몇 년이 지난 상태.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도 섬에서 바닷일, 밭일을 다니느라 K가 혼자 보내는 낮의 시간은 너무나 길었다. 마땅히 돌보아 줄 사람도 갈 곳도 없었다. 그러다 1학년에 입학했으니 K에게 학교는 얼마나 새로운 세계였을까?

그런데 학교가 신기하거나 친구를 좋아하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책상이나 의자조차 무섭다고 했다. 입학식 이후 꽤 오랜 날을 책상 아래서 잔뜩 웅크려 있곤 했다. 몇 되지도 않는 반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일도 K에게힘든 일이었다.

그 학교에서, 아니 그 섬에서 나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고 K와 보호자도 동의를 하여 나는 오후 시간을 그 아이와 보내기로 했다. 혹시 스트레스를 받아 교실활동을 안 하겠다 할까 봐 놀이처럼 공부하자 마음먹었다. 우리는 매일 늦게까지 교실에 색종이도 접고 그림을 그리거나 한글자석 놀이를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그 친구는 여학생이었고, 나도 여성이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혼자 오래 시간을 보내 K가  불쌍하다며 일을 나가실 때마다 용돈을 쥐어 주었다. 그 덕에 수학은 곧잘 했다. 아니, 계산을 끝내주게 잘했다. 혼자 과자를 사 먹으면서 터득한 덕분이.     

문제는 한글이었다! 자기 이름 석 자를 읽을 수 있는 건 다행이었다. 따로 떼어서 써놓은 이름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쓰기만 하면 문제였다. 이름 석 자를 항상 한 자리에 겹쳐서 썼다. 거스름돈까지 야무지게 잘 챙기는 돈 계산에 비해 도형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겹쳐 쓰기도 일맥상통했다. 당연히 이름 외의 글자는 읽지 못했다.

큰 어려움은 글자와 소리의 1:1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 글자씩 읽는 소리에 맞추어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니 짝 맞추는 원리는 멀리 있을 수밖에. 5월이 지나고 6월이 지나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낱글자로, 그림 카드로, 자석 글자로 접근했다. 간식을 나눠먹을 때도 온갖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적어도 이름 세 글자만은 따로 떼어서 쓰도록 돕고 싶었다. 그것이 그 아이와 할머니의 첫 번째 바람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름의 세 글자를 가르치기 위해 오래 공을 들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던 듯 갑자기 세 글자를 떼어서 썼다. 박수를 치고 그 아이의 등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법석인 나에 비해 정작 K는 너무도 태연했다. 어제의 이름과 오늘의 이름이 왜 다르고, 선생님은 왜 갑자기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계속 한글 공부를 하고 싶어 한 것은 너무나 다행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는 동안 그 아이는 좋아하는 공부 방식이 ‘칠판’이었다고 고백도 해주어서 칠판 가득 글씨를 쓰기도 했다. 아,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림 그리거나 종이접기, 자석 붙이는 건 오히려 재미없다고 했다. 공책 가득 똑같은 글자를 빼곡히 써서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에도 가끔 예전처럼 한 곳에 모인 글씨로 뒷걸음칠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가방’이라는 글자를 배우겠다고 요청했다. 그토록 그림으로 그려보고 종이 접기로 해 보던 쉬운 ‘나비’도 익히지 못했는데 갑자기 받침까지 있는 ‘가방’을 배우겠다고 하니 사실 걱정이 되었다. 당시의 나는 개인 선생에 가까웠고, 마치 교사의 임무가 한글은 한 글자씩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만 해도 성공한다고 믿을 정도로 내 오후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K의 의지 하나만은 굳게 믿었으므로 감사했으므로 사랑했으므로 기꺼이 ‘가방’을 가르쳤다.

마치 나를 배려하는 것처럼 그 아이는 10칸 국어 공책을 활짝 펼쳐 내밀었다. 맨 윗줄 20칸에 ‘가방 가방 가방 가방 가방 가방 가방’을 나란히 써 주기만 하면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했다.

“선생님이 써주기만 하면 나는 공부를 재미있게 해요. 많이 써주세요. 뒤에도 많~이요.”

자기는 그 아래에 길게 따라서 쓰겠다 했고 정말 싫증 한번 내지 않고 글씨를 따라 쓰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름 쓰기 때처럼 어느 날 갑자기 가방 글자를 쓸 수 있다며 나를 칠판으로 데려갔다. 가방을 가득 써가며 공부했던 공책이 한 권을 넘어 두 권 째의 어느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정말 또 한 번 거짓말처럼 혼자서 겹치지도 않고 ‘가방’을 써냈다.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했다.   

        


성공을 맛본 열정의 내 클라이언트께서는 이제 세 번째 낱말 배우기를 그날 즉시 요청했다. 여름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 낱말은 바로 ‘가지’였다. 도대체 가방과 가지의 연관성을 떠올릴 수가 없던 나는 물어보았다.

“왜 갑자기 ‘가지’를 배우고 싶어?”

“할머니가 요새 밭에서 가지를 많이 따와요. 선생님도 갖다 줄까요? 가지를 많이 보니까 가지 글자를 배울 거예요. 나 공부 잘하니까 이제 가지 배울 수 있죠?”

할머니가 가지를 많이 따오신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그 글자를 배우겠다는 거다. 어쨌든 나는 받침까지 있는 ‘가방’에 비해 받침도 없으면서 심지어 ‘가’라는 글자는 같은 글자이니 방학 전에 당연히 마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신이 났다. 하지만 배움의 속도는 비슷했고 여름방학을 하루 앞둔 오후 나는 힘이 빠졌다. 분명 즐거운 방학이 코앞인데도 칠판 앞에서 자꾸 힘이 빠졌었다.       

    


칠판에 크게 가방을 쓰고 이름 석 자를 쓰고 놀던 그 아이가 이제 그동안 배운 모든 글자, 즉 일곱 글자를 모두 쓸 수 있다며 신이 나서 나를 칠판으로 이끌면서 문제를 내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신이 나서 칠판에 크게 써진 글자를 한두 개씩 손으로 가려놓고 읽어보게 했다. ‘가방 가지’라고 써진 곳에서 쉽게 ‘가방’을 읽길래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방’을 손으로 덮어 가리면서 물었다.

“선생님이 손으로 가린 글자 빼고 나머지 세 글자는 쉬우니까 읽어보자.”

칠판에서 내가 손으로 가린 곳을 빼고 눈에 보이는 글자는 ‘가  가지’가 남아있었다.

“그래요. 나 잘해요.”

읽어보겠다고 큰소리치던 아이가 뒷부분의 ‘가지’를 잘 읽길래 칭찬해 주고는 ‘방’을 가렸던 손을 뗀 순간!

“뭐야, 왜 ‘가지’가 거기에 들어있어요?”

했다. 그렇게 나를 한순간 힘이 빠지게 해 놓고는 정작 아무렇지 않은 나의 제자는 이번에도 역시 대단한 의지를 드러냈다. 밝게 웃으며 공부를 많이 하겠다며 방학 숙제를 셀프로 요청했다. 공책 몇 권을 가져와 맨 윗줄에 자신이 요청한 다양한 글자들-받침의 유무, 생활과의 관련성을 도무지 알 수 없는-을 써달라고 해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방학에 들어갔다. 여름방학 동안 배움이 끊길까 봐 미안한 기분도 있었지만 섬 밖에 있는 두 살 된  아이에게로 갔다.           



개학을 하고 우리의 오후 시간은 다시 열정모드였다. K 여전히 신나게 공책을 채워 나갔다. 하지만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즈음까지도 쓸 수 있는 글자는 많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 섬에서의 마지막 해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그래도 K는 학기말 방학 때도 여전히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웃었다. 우리는 종업식을 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그 아이가 2학년이 된 다음 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K가 스승의 날에 감격스러운 감사 편지를 한쪽 가득 써서 보내왔다.

“선생님, 이거 내가 혼자 다 썼어요.”

그 많은 글자를 모두 혼자서 써낸 거라는 자랑! 믿기 힘든 그 부분을 읽기 전부터 내가 그 아이에게 ‘스승’ 임이 감사했다. 그리고 섬에서 자라고 있는 커트 머리의 아주 자그마한 그 아이가 너무나 그리워서 눈물이 왈칵 났었다.



그랬던 아이를 10년 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엄청나게 떨리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아직도 할머니는 살아 계시고 그 아이는 섬에서 중, 고등학교를 쭉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옛날 1학년 때 매일 집으로 갈 때 그랬던 것처럼 또 꾸벅 감사 인사를 하고 여전히 밝게 웃으며 그 아이는 마을버스를 타고 떠났다.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요즘도 문해력 향상을 위한 개별 지도를 생각하면 K가 함께 생각난다.

“선생님, 영어 학원 버스가 오니까 절대 늦게 끝나면 안 돼요. 늦으면 엄마가 학원에 전화도 해야 되고 엄마차로 가야 되니까 안 돼요. 알았죠?”

때로 피아노나 태권도 학원에 가야 한다며 절대 하교 시간이 늦어지면 안 된다는 어떤 아이들을 볼 때 왠지 그 아이가 떠오른다. 혼자 교실에 남는 방식의 공부는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먼저 밝히는 학부모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정열의 나의 제자가 너무나 그립다. 꾸벅하던 그 인사가, 빼곡하던 10칸 국어공책이, 밝게 웃던 짧은 커트 머리 여자아이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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