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목록 1호, 교실에서는 제본기

독서토론+인문표현교육

by 다움 달

선생님들은 겨울 방학이나 학년말, 학교를 옮기는 시기에 교실 이사를 한다. 한 해 살림살이는 양뿐만 아니라 종류도 제각기 다르다. 간혹 1톤 용달차를 이용하여 짐을 옮기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니 한 학년도 농사에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 증명하는 듯하다. 학교급이나 지역에 따라 교실에 학습 준비물, 사무용품이 모두 갖추어진 경우도 있다. 반대로 학습 준비물과 각종 자료를 남김없이 비우고 교실을 떠나야 하는 관례를 따르기도 한다. 누군가가 혹 교실 이삿짐을 살짝 엿본다면 그 교실의 운영 방향이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매년 가지고 다닌 교실 짐은 제본기다. 일정 간격으로 천공을 해주고 플라스틱 링을 걸어 책으로 만들어주는 신통방통한 물건이다. 아이들이 만든 크고 작은 종이접기 모음이나 학습지, 작품을 묶어줄 때 유용하게 쓰인다. 배부용 가정학습 자료를 만들 때 역시 훌륭한 도구이다. 꽤나 무겁고 때로는 A4용지를 A5로 자르는 등의 수고가 따르지만 나는 제본기를 사랑한다. 수작업의 고충을 넘어서 충분한 교육적 효과가 높다. 여러 선생님들에게 널리 추천하고 싶은 교실 아이템이다.

제본기의 매력에 빠진 시기부터 올해까지 몇 년 동안이나 스물네다섯 명 학생과 함께 하고 있어 마음만큼 제본기를 자주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특성상 모두에게 똑같이 배부되는 받아쓰기 연습 자료나 독서기록장 등을 만들 때 좋다. 똑같은 자료를 복사해서 같은 매수로 묶어서 만들어 내는 기본적인 책에 어울린다. 그래서 학생 수가 적은 학급에서 활용한다면 효과가 훨씬 클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용지의 크기다. 일반적으로 사무용으로 많이 쓰는 A4용지와 B4용지를 이용하는데 프린터 출력부터 한 번에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프린터 기종에 따라 소책자 인쇄가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제본 작업 의욕을 떨어뜨리는 종이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 때는 먼저 A4용지로 모아 찍기 단면출력을 한 후 순서에 맞게 책 형태로 정리한다. 이때는 양면 출력에 맞도록 순서와 방향이 뒤집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다음 복사기로 가서 A4용지에 학생 수보다 넉넉한 부수로 복사해 온다. 교실에 와서는 종이재단기로 가운데를 잘라 A5크기로 만든다.

사실 A4용지 그대로의 사이즈로 책으로 만들어도 되지만 막상 만들고 나면 굳이 번거로운 이 작업을 거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아무튼 여기까지 작업을 해야 제본기 앞에 설 수 있다. 제본기에 나란히 종이들을 넣고 타공 간격을 맞춘다. 너무 얕은 곳에 구멍이 뚫리면 금세 책의 형태를 벗어나고 낱장으로 분리되어 곤란해진다. 다시 보완해야 하는 제본 작업은 처음보다 훨씬 어렵고 성공하기 힘들기 때문에 처음부터 책의 중앙부로 깊게 타공 간격을 맞추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종이 매수와 스프링 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배부되는 자료가 10장을 넘어가는 경우는 제본기에서 타공작업을 수없이 해야 한다. 한 번에 5장 정도가 잘 뚫리는 한계이고 표지도 더해지므로 학생 수에 몇 곱절을 더 작업해야 하는 것이다. 전체 학생의 자료를 모두 타공 했다면 다음 작업은 스프링을 끼우는 단계가 남았다. 스프링은 구입처나 상자에 있는 것보다 반드시 넉넉한 크기를 사야 한다. 책으로 만들어서 넘기다 보면 뻑뻑하게 넘어가지 않아 곧 이유를 알게 된다. 자료의 종류에 따라 스프링의 지름 크기가 달라지므로 여러 사이즈를 가지고 있지만 늘 지름의 숫자에 속는다. 모로 가도 여기까지 오면 서울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다.

드디어 종이가 책자가 되어 나오면 아이들은 자기 책이 생긴 것에 환호한다. 비록 그 안에 있는 받아쓰기 자료를 집에 가져가서 얼마 보지도 않고 던져 놓을지라도 자기 책을 소중히 여긴다. 너덜너덜해져서 보수가 필요하여 다시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97쪽. 낡아도 버릴 수 없는 열일하는 제본기, 순천.jpg 손잡이가 녹아내리고 누렇게 변해도 버릴 수 없는 제본기

나는 여기에서 제본기의 교육적 효과를 믿는다. 아이들은 책이 어떻게 망가졌든 내게 와서 고쳐 달라, 다시 만들어달라 요청한다. 자기만의 책이기 때문에 애정을 담뿍 담고 행여 책의 형태로 살아나지 못할까 진지해진다. 숱하게 작성하는 수업 시간의 학습지가 한 장의 종이였을 때는 교실 어딘가에서 뒹굴게 두거나 별 미련 없이 휴지통에 버리는 아이들인데 말이다. 자기 책에 대한 아이들의 애정을 발견하고 나면 앞의 그 복잡한 작업 과정이 있는데도 제본기로 책을 만들어주게 된다.

모두 같은 자료를 나누어 주는 경우도 이러한데 자기가 직접 쓴 동시나 이야기책이면 어떻겠는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뛰어다니며 자기 책을 자랑하여 소란스럽게 되긴 하지만 나는 뿌듯했다. 자기만의 책이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모르는 글씨를 물어보러 온다. 친구의 책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한다. 자기 책을 소개, 전시하고 발표도 한다. 이것이 독서활동이며 표현 교육 아닐까? 자기 책 안에 있는 글자 중 못 읽거나 못 쓰는 글자는 친구나 내게 물어서 한 글자씩 고치고 바꾸어 읽는다. 문해력 향상 교육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친구와 마음을 나누고 제본의 과정에서 서로 돕는 것이 생활지도가 되고 인문교육이 된다고 생각한다. 수업 모형 안에서만, 어떤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독서교육, 문해력 향상 교육의 답이 나에게는 제본기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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