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 속에 진실이 머무는지 3
모두가 듣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에 대한 첫인상은 대부분 '차가워 보였는데'로 시작했다. 이어지는 모든 반전 평가는 들리지 않고 PTSD를 자극하며 내 귓속을 왕왕 울린다.
'차가워 보인다'는 그 말을 안 듣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어린 동안 평생을 노력했던지. 그 노력의 진정성과 처절함을 안다면 다들 안쓰러워서라도 앞에 저 말을 떼내 줄텐데.
차가운 게 나쁠 건 없지만 나는 그냥 안 차갑다. 오히려 차가울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으나, 그게 전혀 불가능하던데 사리에 맞질 않지 않은가. 편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20대 중후반, 세상이치도 좀 알고 긍정적 자아상도 세워질 즘 생각했다. '모두가 그리 말하는 데는 개연성이 있지. 적어도 나는 외모가 차갑게 생겼나 보다. 누구보다 많이 웃고 미소 짓는 데도 커버되지 않는 차가움이라니. 그렇다면 나는 '겉바속촉'의 매력이 있군.'
그런데 이제 더 세월이 흘러 나는 생각한다. 감춰지지 않는 모든 것들이 애처로워 보이는 요즘, 과거의 나는 늘 차갑게 보였을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차가웠던 것 같다. 차가움에도 종류가 있는 줄 몰랐다. 차가움에 대한 편견은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었다.
감춰도 드러나는 것들, 주워 담아도 새는 것들, 빛과 온도. 나의 차가움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화려함이나 방어력 있는 차가움이 아니라 매트하게 푸석이는 희뿌연 회색의 차가움이었을까.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는 데 모든 기를 다 쓰고 타고 남은 연탄재처럼 형체만 유지한 채 꼿꼿이 선 희뿌연 어린 나. 절망의 붉은 불을 온갖 희망의 초록으로 중화하고서도 슬픈 회색 마음이 된 나. 제 아무리 다정해봐도 그 희뿌연 회색은 차가워 보였겠다.
아직도 사람들과 두세 걸음 정도만 떨어져 있길 원하는 건, 밝은 온기가 좋으면서도 낯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요, 저는 꽤 차가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커밍아웃을 했으니, 필히 새로운 사람에게서 '차가워 보였는데'로 시작하는 첫인상을 듣게 될 때, 그다음 말들을 귀 기울여 들을 여유가 주어질까. 감사하게도, 이미 차가운 나에게 빛을 입혀주고 온기를 더해주는 말들이었을 텐데, 그간 많이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