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전 일이다. 제주 이주 1년이 지날 무렵 내가 다닐 회사를 알아보았다. 식당은 시어머니와 남편이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같은 국공립어린이집을 보내게 되었다. 밤 9시 30분까지 아이들을 봐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일부러 선택했다. 식당이 바쁘면 언제든지 가서 일하기 위해서 늦게까지 아이들을 봐줄수있는 어린이집으로 구했다.
아무 지인이 없는 제주에서 아이들 봐줄 곳은 어린이집뿐이었다. 제주이주 1년이 지날때 생활이 안정화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속마음은 나 스스로 돈 벌고 싶었다. 집에서 놀고 있는 며느리가 아닌 워킹맘.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식당으로 돈을 벌어오지만, 유동적이기 때문에 나는 안정적인 월급으로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작은 회사 경리 일을 했었다. 본사가 서울에 있고, 춘천에 지점이 있는 작은 곳이었다. 간단한 문서작성과 영수증을 정리하여 본사로 올려주면 끝. 10명 남짓한 회사에서 모두 나이 많은 남자 어르신들이었고, 나 혼자 여자였다. 가끔 회식하면 술은 못 먹는다고 하고, 콜라 사이다만 홀짝거렸다. 그 시절에는 술도 한잔 입에도 대지못했다.
내가 회사에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남편은 허락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땐 맞춰주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은 얘기지만 1년 다니면 그만 다니겠지 하고 허락했단다. 제주에서 첫 직장은 법무사사무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남편의 예상을 뛰어넘어 5년을 다녔다.
망할 5년.
지금 생각하면 후회된다. 나는 뭐가 좋다고 다녔을까? 내 귀도 입도 막고 나의 경력을 위해서 다녔을까?
매번 부부싸움 언쟁의 끝은 나의 회사 5년을 외치며 말문을 닫게 했다. 왜냐하면, 5년 동안 남편은 나에게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단다. 난 못 들었지만. 나는 듣고 싶은 얘기만 들었지 남편 말에는 귀를 닫았나 보다.
제주도에는 법무사사무실이 100여 개가 있다. 그중에서 내가 다닌 곳은 매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 그만큼 일도 많고 여자도 많고 말도 많은 곳이었다. 법무사사무실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근무했고 야근도 없고 휴일에 모두 쉴 수 있어서 육아 맘에는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무실에서 초보 막내였다. 온통 제주 토박이들 속에서 육지 아이로 통했고 사투리로 얘기하면 나는 못 알아들었다. 나보다 나이가많고 경력직 여자직원분들이 4명이나 있었다. 나는 그 틈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법무사업계에서 10년 이상 된 여직원들은 기가 세고 말도 거칠었다. 여기서 5년 동안 한 귀로 들으면 다른 한쪽 귀로 흘려보냈다.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고 말도 옮기지도 않았다. 그저 미소만 지으며 살았다.
첫 월급은 100만원 초반 이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남편이 월급이 얼마냐고 물어보았을 때, 내가 당당하게 말했다. 헛웃음 지었던 남편의 얼굴이 어이없어했다. 남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가서 200만 원도 못 벌어온다고 뭐하러 다니느냐고하며 그말도 했었다고 한다. 그 시절 난 귀를 닫았다.
안정된 월급을 떠나서 식당이 나가기 싫었고, 남편이랑 같이 일하는 자체가 꺼려지는 나 혼자만 이기적인 생각을 했었다. 남편이 하는 모든 이야기에 귀를 닫았고, 입을 닫고 소통 없이 쇼인 도 부부처럼 대화도 없이 시간을 보냈다. 30대 후반을 망할 5년을 누굴 위해서 살았냐 말이다.
40대 초반 남편이 보이기 시작했고,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춘천에 계신 시할머니가 아프셔서 시어머니가 춘천으로 가시게 되었고, 같이 일했던 중국인 직원도 남편이 바람나서 이혼 도장 찍으러 중국으로 갔다.
남편 혼자 식당을 1년 동안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니, 눈이 떠졌다.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가서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도록 하기 싫었던 식당을 남편과 지금 같이하고 있다. 내가 회사에 다닌 망할 5년 대신 더 빨리 가게에 합류했으면 더 잘 되었을 거라고 술만 먹으면 말하는 남편 입을 틀어막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