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 우리에게 온 닭갈비

by 봄날의춘천저널


춘천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음식은 닭갈비와 막국수이다. 닭갈비 골목이 동네마다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닭갈비는 철판 닭갈비와 숯불 닭갈비로 나눈다. 철판 닭갈비는 양배추와 고구마, 떡을 철판에 넣고 볶다가 가락국수사리를 추가하고 나중에는 볶음밥을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숯불 닭갈비는 소금, 간장, 양념으로 숙성된 닭갈비를 숯불에 구워서 먹기에 숯 향을 느낄 수 있다. 십 년 전 춘천은 소양강댐 근처, 춘천시청 명동거리, 후평동, 석사동, 온의동에 집중적으로 닭갈비 골목이 있었다. 전철이 생기고 나서는 춘천역, 남춘천역 주변에도 많이 생겼다. 그만큼 춘천은 닭갈비식당이 넘쳐났다.


시어머니는 집 근처 상가에 작은 식당을 하셨다. 닭갈비는 기본, 닭발과 닭똥집을 주메뉴로 저녁부터 그다음 날 새벽까지 일하셨다. 작은 식당에서 주방과 홀을 오가며 혼자 하셨다. 바쁠 때는 아버님이 가시거나, 아들, 딸을 불러 도움을 요청하셨다. 손맛이 좋으셨던 어머님은 단골도 많았다. 일을 끝마치고 집에 가면 아침 6시, 7시는 기본. 시어머님은 돈을 많이 벌면 신이 나서 힘든 줄도 모르고 일하셨다고 하셨다. 신혼 초기 퇴근 후 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쉬고 있을 때 어머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가게가 바쁘다고 하면서 나보고 와달라는 전화. 단숨에 달려가니 홀은 만석. 어머님이 고군분투하고 계셨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 어머님은 식당을 몇 년 더 하신 후에 몸이 아프고 힘들어서 폐업을 결정하셨다. 동네슈퍼를 시작하여 칼국수, 보리밥 식당, 순대국밥까지. 쉬지 않고 그동안 해오신 어머님이시기에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남편은 결혼 초기 휴대전화 판매매장을 했다. 혼자 단독으로 운영하기도 했고, 동업으로 하기도 했다. 같이 동업했던 형한테 배신을 당하며 온갖 수모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겪었다. 그 시기에 단통법(휴대전화 단가가 똑같이 되는 것, 휴대전화 판매업자로서는 이윤이 줄어드는 상황)이 생기면서 휴대전화매장을 더는 꾸려갈 수 없다고 판단. 숨만 쉬어도 나가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남편은 가장으로서 어깨가 무거워지고 더는 손가락만 빨 수만은 없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신 어머니는 닭갈비식당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을 하셨다. 야심 차게도 어머님은 본인 고기 양념 맛은 어디를 가든 자신 있다고 자부하시며 아들 기를 한껏 세워주셨다. 춘천에는 넘쳐나는 닭갈비식당. 춘천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홍천, 원주, 횡성, 가평, 청평 등 춘천 주변 지역을 알아보았다. 치솟는 임대료와 권리금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머리도 식혀 볼 겸, 식당 하면 잘 쉬지도 못한다고 하길래 제주도 여행을 왔었다. 제주도는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드넓고 푸른 바다를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닭갈비식당은 손에 꼽을 만큼 제주에는 없었다. 두 아이를 자연에서 뛰놀며 키울 수 있고, 닭갈비 하나로 제주에 우리 인생을 걸고 싶은 마음이 불쑥 쏟아 올랐다. 그야말로 여행 왔다가 제주에서 제2의 인생을 설계했다.


2015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시기. 새로운 마음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던 그날. 우리의 부푼 마음은 돈을 많이 벌어서 건물 하나쯤은 사서 춘천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왔지만, 현실은 우여곡절을 지나 버티는 중이다. 꿋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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