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나는 학창시절, 학년 초에 나누어 준 유인물에 취미와 특기란을 채우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곳을 채워야 하는데 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 어쩌면 그 당시에 취미를 갖는 것은 사치였는지 모른다. 나는 잘하는 것도 없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어서 독서라 적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독서는 취미도 특기도 될 수 없다고 하셨다. 독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선생님의 그 한마디로 내게 그나마 있던 취미가 사라졌다. 나는 그때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생활을 살아가기에 바빴다. 만약 내가 고무줄놀이를 잘한다고 해도 취미나 특기란에 적지는 못했을 것이다. 피아노 치는 것은 취미와 특기가 될 수 있지만 고무줄놀이는 취미와 특기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내가 뭘 좋아했는지 모르겠고, 무엇을 잘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은 취미와 특기가 있을까?
‘에코몬’ 보드게임을 하던 날이었다. 에코몬들은 각각의 능력(특기)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타일 한 개를 태울 수 있는 있는 이글몬, 워낙 빨라서 한 번 더 차례를 진행할 수 있는 번개몬, 한 개의 타일을 더미에서 가져올 수 있는 씨앗몬, 바람결에 날려 다른 친구 타일과 내 타일을 교환할 수 있는 살랑몬, 누구와도 짝꿍이 될 수 있는 만능몬 등. 타일을 한 개씩 두 번 뒤집어 같은 캐릭터를 가져온 메모리 게임이 기본이다. 같은 캐릭터를 가져오면서, 그 캐릭터의 특수 능력으로 인한 행동을 하면 된다. 에코몬들의 능력을 이야기하기 전에 아이들이 뭘 잘하는지 이야기 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잘하는 것을 찾기 위해 손을 꼽으면서 웅얼거렸다. 손가락 꼽다가 더 말하고 싶었는지 6개 말하면 안 되냐고 묻기도 하고, 3개만 말하면 안 되냐고도 묻는다. 난 모두 5개를 말할 거라고 했다. 아이들 표정을 보니 나름 다 찾은 것 같기도 하고, 못 찾았어도 다른 친구들 발표할 때 생각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구부터 할거냐고 크게 물으니,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중에 가장 손을 높이 든 아이에게 기회를 주었다.
“태권도를 잘해요, 피구를 잘해요, 달리기를 잘해요. 마인크래프트를 잘해요. 로블록스를 잘해요.... 한 개만 더 말하면 안돼요?”
아까 안 된다고 했는데, 기어이 말하고 싶은가 보다. 내가 답하기도 전에 아이가 말했다. “영어도 정말 잘해요.”
요즘 영어학원을 다닌다고, 영어로 질문을 하고 답을 하더니 결국 한 개 더 말하는 아이. 다음은 바로 옆에 아이에게 물어봤다.
“만들기를 잘해요. 색종이접기를 잘해요. 그림을 잘 그려요. 음... 선생님 클레이 만들기라고 말해도 돼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이 만들기도 잘해요. 음... 그리고 없는 것 같은데.”
손가락까지 꼭꼭 접으면서 말하는 아이가 잠깐 생각이 나지 않은 듯 뜸을 들였다. 내가 웃으면서 너는 스포츠 시간에 피구 안하냐고 물었더니
“아~~~ 피구에서 공받기를 잘해요.”
하면서 활짝 웃었다.
아이들은 잘 하는 것이 많았다. 축구, 배드민턴을 잘하고, 만들기, 색종이 접기도 잘 하고, 줄넘기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쳤다. 나는 생전 들어보지도 않은 게임 이름도 나왔다. 그런데, 하늘이는 두 번을 물어도 자신은 잘 하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주위의 친구들에게
“하늘이 잘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친구들이 말해줍시다.”
종이접기도 잘하고, 큐브도 잘하고, 덧셈도 잘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
하늘이가 말끝을 흐렸다. 옆에서 지켜본 내가
“선생님도 네가 큐브 하는 것 몇 번 봤는데 정말 잘하던데.:
라고 말해주었다. 하늘이는 인정할 수는 없지만 모두 그렇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겠다는 표정이다. 하늘이는 잘한는 게 많다. 그래서, 내가 자주 칭찬을 하는데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항상 안타까왔다.
노을이는 자신의 차례가 되더니 활짝 웃으며 이야기했다.
“동생을 잘 돌봐요. 동생과 잘 놀아줘요. 숙제를 잘 해요. 가방 정리를 혼자 잘해요. 거실 정리를 잘해요.”
노을이의 말을 듣는 데,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동생을 업고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었던 내 모습이 노을이의 웃는 얼굴 위에 보였다. 그래서일까? 조금 일찍 철이 든 아이. 칭찬을 해줘야 하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색종이 접기가, 줄넘기가, 피아노치기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을 잘 돌보는 게 잘하는 것인 노을이가 안쓰러웠다. 그건 내 마음이었다. 발표한 노을이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와. 노을이가 동생과 잘 놀아주고 돌봐주는 구나. 엄마가 정말 좋으시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난 노을이를 보면서 웃었다.
다양한 에코몬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이들은 게임을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에코몬 캐릭터가 따로 있지만 어떤 능력이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에코몬들처럼 우리 아이들도 각자 잘 하는 게 있을 것이다. 오늘 잘하는 것을 발표해서인지 아이들이 달리 보인다. 평소에는 어렵다고 징징대기도 하고, 일어서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가끔은 울기도 하고, 친구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졌다고 엎드리기도 하던 아이들이, 오늘은 영어도 잘하고, 줄넘기도 잘하고, 로블록스도 잘하고, 피구에서 받기도 잘하는 능력이 많은 아이들로 보인다. 지구를 책임지는,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누구의 능력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처음에는 안타깝고 짠해 보이던 노을이의 능력도 멋지다. 동생을 잘 돌본다는 것은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잘 돌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테레사수녀처럼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릴 때의 내 취미는 읽는 것이다. 농민신문을 아빠 옆에서 읽었다. 독서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지만 농민신문 읽기라고 하기는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특기. 잘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찾아도 없지만 그래도 찾으라고 하면 혼자 아기 업기라고 할까?라고 하다가 그냥 웃어버렸다. 책 몽실이 언니의 표지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 어리긴 했지만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 같다. 여름에는 포대기가 아닌 천기저귀로 아기를 참 야무지게 업었는데. 그렇다고 한들, 특기에 아기 업기라고 적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결국 다시 그 시간이 와도 내 취미나 특기는 독서라고 썼을 것 같다.
에코몬 게임을 하던 날 아이들은 잘하는 것을 5개나 발표했다. 그렇게 찾아낸 아이들이 부럽다. 동생돌보기가 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활짝 웃었던 노을이도 부럽다. 난 얼마나 더 자라야, 잘하는 것을 5개 발표할 수 있고, 동생 돌보기가 잘하는 것이라고 발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