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판 남들이랑 지은 집이
나를 살렸네

'제라한'* 집의 탄생 - 관계를 담는 집 짓기

by 조선희
*제라한 - '제대로 된' '진짜의' '완벽한'이라는 의미의 제주어. '제라진'도 같이 쓰인다.


2021년 12월, 마침내 공사가 시작되었다. 꼬박 1년의 설계를 거쳐 역사적인 첫 삽을 뜬 것이다. 물론 ‘첫 삽’은 비유일 뿐. ‘VOLVO’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중장비가 위풍당당하게 부지를 누비며 기초작업에 들어갔다. 마치 마술처럼, 눈 깜짝할 새 집이 완성될 것만 같아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출퇴근길마다 공사장에 들러 진행 상황을 살피는 재미에 빠졌다. 해가 바뀌자 터를 빙 둘러 비계가 설치되었고, 2월부터는 경량목구조 벽체가 하나둘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기대와 조바심과는 달리 속도는 더뎠다.


공교롭게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건축 자재 수급이 느려지고, 가격은 폭등했다. 전쟁이 이렇게 느닷없이 내 일상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결국 포기해야 할 것도 생겼다. 외벽 마감재로 수입 백고벽돌을 고려했지만, 국내 재고가 넉넉지 않아 중국산을 들여오자니 공사 시기와 단가를 맞추기 어려웠다. 단념했다. 그 밖에도 자재를 교체하거나 대체품을 구하려 해도 국내에 없으면 그냥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단념하고 포기하는 법을 익히는 것조차 건축의 일부였다.



마루, 팔자에도 없는 ‘현장 감독’ 되다

비누와 마루는 육지 집을 팔고 제주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먼저 내려왔다. 가까이에서 공사를 지켜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수와 루나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고, 현직에 있는 나 역시 현장을 자주 지키긴 어려웠다. 막상 공사가 시작되니 현장은 시시각각 변했고, 그때마다 건축주로서 결정해야 할 일들이 쏟아졌다. 건축사의 도면, 시공사의 판단, 건축주의 의도가 착착 맞아떨어지면 좋겠지만 현실은 번번이 어긋났다. 이래서 집을 짓고 나면 10년은 늙는다는 말이 나왔겠지.


처음엔 비누가 현장 조율을 맡았지만, 업무가 과중해 이러다간 완공되기도 전에 사람이 먼저 탈 날 지경이었다. 마루가 전면에 나섰다. 매일 현장에 출근해 상황을 점검하고, 우리와 소통하는 창구가 되어주었다. 그 덕분에 얻게 된 별명이 ‘현장 감독’. 이 과정이 재미있었던지 마루는 집에 대한 애정이 커졌고, 언젠가 한 번 더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단다. 집 짓기도 백문이 불여일작(百聞不如一作),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지어보는 게 나은 게다.



‘아만자’ 되다

4월이 되어서야 전체적인 뼈대가 올라갔다. 기둥과 보, 서까래가 얹히자 도면으로는 상상도 못 했던 목구조의 위용이 드러났다. 웅장하고도 아름다웠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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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외관이 갖춰지는 사이, 내 정년퇴직 날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새해 초 다이어리에 적어둔 ‘퇴직 전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유방암 검사였다. 워낙 불편한 검사라 늘 뭉그적거리기 일쑤였지만 이번엔 묘한 불안감이 더해져 병원 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초음파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조직검사 끝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정년퇴직을 딱 한 달 앞둔 5월 말이었다. 그렇게 나는 졸지에 ‘아만자(암환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일상은 멈췄다. 뻔질나게 들렀던 공사 현장과도 작별이었다.


겪어봤기에 더 치명적인

서울의 종합병원 몇 군데에 예약을 넣었지만 빠른 시일 내 진료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 암이라고 해서 어디가 죽도록 아픈 것이 아니었다. 겉은 멀쩡한데 몸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시간을 한 달 이상 견딘다는 건, 말 그대로 고문이었다.


말기암으로 Y를 보낸 지 15년 만에, 이번엔 내 몸이었다. 간신히 수렁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더 깊은 수렁으로 툭 떨어진 느낌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세상과의 문을 굳게 닫았다. 감정과 이성이 동시에 무너졌다. 집은 지어서 무엇하랴, 하는 심정이었다.


수술을 받고 이후 3주마다 서울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았다. 이어지는 방사선 치료는 매일 받아야 했기에 병원 근처 요양병원에 한 달가량 입원했다. 그리고 2022년 12월 말,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짓기 시작한 지 1년, ‘아만자’가 된 지 7개월 만이었다.



함께 고해(苦海)를 건너온 집과 나

만감이 교차했다. 한때는 심사가 뒤틀려 “난 삐뚤어지고야 말 테다.”하는 심정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를 인생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집을 짓느냐며 냉소했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나 집은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세워졌고, 나는 이를 악물고 투병의 시간을 버텨냈다. 그 시간들을 지나온 지금, 나와 집은 함께 고해(苦海)를 건너온 동지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였다면 투병도 더 고통스러웠을 테고, 집 짓기는 아예 중단되었을 게 뻔하다.


그 힘든 항암 기간 동안 비누는 내 먹을거리를 틈틈이 챙겨주었고, 마루는 서울을 오르내리는 공항길을 도맡았다. 수 역시 언제든 시간을 내어 운전기사가 되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직접 인테리어에 참여하지 못하자, 이들은 공사 진행 사진을 수시로 공유해 주고, 의견을 물어주며 나를 현장과 연결해 주었다. 나는 혼자 아픈 게 아니었고 이 집은 저절로 지어진 게 아니었다.


'커뮤니티 케어', 실전으로 검증하다

물론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꿈꾸던 셰어라이프의 본질을 미리 체험한 셈이었다. 함께 살기로 하며 우리끼리 나눈 구두 약속이 있다. 치매가 아닌 이상, 요양원이 아니라 집에서 서로를 돌보며 노후를 보내자고 말이다. 그 실험의 첫 주자가, 바로 가장 연장자인 나였던 것.


입주 후에도 나는 3주마다 서울을 오가며 1년 가까이 표적치료를 받았다. 그 시간 동안 미로허니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배려해 주었다. 티 나지 않게, 유별나지 않게 건네는 돌봄과 보살핌 덕분에, 받는 나 역시 편안하고 따뜻했다.


단지 공간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노후를 함께 돌보는 삶.
'커뮤니티 케어'의 가능성을 리허설처럼 겪어본 귀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잃은 건 공사 현장의 기억이었고,
얻은 것은 우리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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