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헌 탐구생활 - 공간이 바꾸는 관계의 풍경
미로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공유 공간’이다. 개인 공간을 빼면 나머지는 전부 다 같이 쓰는 곳. 집을 설계할 때 마루는 자주 말했다.
개인 공간은 스무 평도 안 되지만 우리는 이 집 전체 백 평을 함께 누릴 거야.
그리고 그 말은 고스란히 현실이 되었다.
각자 모든 짐을 개인 공간에 다 안고 살았더라면 훨씬 큰 집이 필요했을 거다. 냉장고와 열원 갖춘 주방, 창고, 서재, 신발장까지, 이걸 다 개인 공간에 집어넣어야 했다면 미로헌은 마치 원룸/투룸 세입자들이 사는 ‘오피스텔’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 거면 뭐 하러 같이 집을 짓겠는가.
공유 공간 덕분에 개인 공간은 슬림해졌고, 덩달아 깔끔해졌다. 덕분에 ‘이 방, 잡동사니는 다 어디 갔누?’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진짜 묘미는 따로 있다. 공유 공간을 중심으로 우리의 일상이 겹치고, 포개지고, 엉키고, 웃는다. 이런 게 바로 ‘같이 사는 맛’ 아닐까. 설계부터 인테리어까지, 모든 비용은 다 같이 부담했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원칙, 우리 그런 거 꽤 좋아한다.
파란 대문을 열면
겉보기엔 한 채지만, 미로헌은 네 개의 독립 공간이 한 지붕 아래 나란히 놓인 구조다. 네 채의 집에 다섯 명이 산다. 전통 한옥의 채 나눔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나 할까.
여느 공동체 주택처럼 같은 대지 위에 각자 집을 짓는 방식도, 다가구 주택처럼 수직으로 나뉘는 구조도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거실과 침실, 욕실이 있는 공간에서 살면서 하나의 대문, 하나의 현관, 하나의 거실, 하나의 주방을 공유한다.
각 공간에는 방문이자 개별 현관처럼 쓰이는 문이 있어, 물리적으로는 한 채지만 사실상 네 채의 집이 공존한다. 공유 주방이나 세탁실을 제외하면, 각자의 공간에서 쉬고, 자고, 씻고, 싸는 일상이 가능하다.
1층 정면,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주방이 보인다. 3미터가 넘는 아일랜드와 압도적인 크기의 찬장이 인상적인, 미로헌의 시그니처 공간이다. 한창 공사 중일 때 한 번은 누군가 우리 집을 들여다보더니 저 넓은 공간은 무슨 용도냐고 물었다. 주방이라고 답하자 “어쩐지 개인 주택 같지는 않았어요. 큰 고급 식당 건물이군요.” 해서 크게 웃었던 일이 있다.
주방을 1층에 배치한 가장 큰 이유는 서로를 한 번이라도 더 마주 보기 위해서였다. 그 의도는 적중했고, 지금도 우리의 동선이 가장 많이 교차하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주방을 중심으로 한쪽은 비누와 마루 부부의 공간, 다른 한쪽은 나의 공간이다. 우리의 거처는 마주 보는 구조로, 중정 쪽 창 아래 아담한 툇마루가 쌍둥이처럼 놓여 있다. 한옥의 정취가 느껴진다.
봄이면 비누가 겨우내 욕실에서 정성껏 발아시킨 화분들이 하나둘 내 툇마루에 줄지어 놓인다. 햇살을 받고 물을 먹으며, 비누의 애정을 거름 삼아 쑥쑥 자라는 앙증맞은 식물들과 눈을 맞추는 봄날 아침,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현관의 낭만
현관은 완전 개방형이다. 현관문을 포함해 전면이 유리창이고, 주방과는 단차로만 구분된다. 주방은 현관으로, 현관은 마당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20센티미터 남짓 되는 주방의 단차는 앉아서 신발을 신기에 퍽 유용하다. 외출에서 돌아와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누군가와 스몰토크를 나누기에도 그만이다.
한때는 여기에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마당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기도 했다. 겨울이면 길쭉한 현관실은 작은 온실이 된다. 별도의 온실을 두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이다. 춥고 긴 겨울날 조르르 놓인 화분에서 맹렬히 피어나는 꽃들이 주는 위안은 따뜻하고도 근사하다.
2층 풍경
마당에서 2층을 올려다보면, 천고 4미터에 달하는 살롱과 다락의 서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 내리는 겨울 저녁, 불 밝힌 서가를 바라보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책을 읽지 않아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환히 밝아질 것 같은 아지트.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풍경이다.
2층은 공동 거실 겸 회의 공간인 살롱이 중심이다.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 상대적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긴 비누와 마루가 특히 자주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수와 루나의 개인공간이 있는 2층은 한라산 뷰가 탁 트인 ‘뷰 맛집’이다. 두 사람의 공간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 서서 함박눈 쏟아지는 하늘이나 꽃망울이 터지는 속마당의 꽃나무들을 바라보는 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하다.
우리를 닮은 집
사실 미로헌은 건물 자체로만 보면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하다. 미로헌보다 더 훌륭한 구조와 자재로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지어진 집은 세상에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로헌이 특별한 것은 생판 남들끼리 머리와 마음과 돈을 보태 짓고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먹을 만큼 나이 먹은 타인들끼리 인생 후반부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기로 하고 그 물리적 기반이 되는 집을 공동으로 지었다는 것 자체가 미로헌의 특별함인 것이다.
그래서 미로헌은 그냥 ‘집’이 아니라 구석구석에 사연과 기억이 스며들어 있는 우리만의 ‘기념비적인 장소’인 것이다. 처음 구상이나 계획과 달라진 점도 있고, 예상치 못하게 생겨난 공간도 있으며, 우리만 아는 ‘옥에 티’도 있다.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깊이 고민하고, 뜨겁게 토론하고,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결단했다. 그 시간은 서로에 대한 겸손과 배려, 합의를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믿는다. 그것이 바로 성공적인 동거생활을 위한 담금질이었다고.